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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09 목장보고서
장소: 브레드캐스트 kt&g 타워점출석: 노재연, 김정한 <말씀 요약>
제목: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본문: 열왕기하 23:21-27설교: 김양재 담임목사1. 그래도 예배합니다. 요시야는 산당을 부수고 우상을 제거한 뒤, 마지막으로 온 백성에게 “이 언약책에 기록된 대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고 명령합니다. 앞에서는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에게 우상을 제거하라고 명령했지만, 유월절에는 온 백성을 불러 함께 참여하게 합니다. 유월절은 혼자 지키는 절기가 아니라 공동체가 한자리에 모여 어린 양을 함께 먹으며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을 기억하는 절기이기 때문입니다. 산당의 예배가 자기 필요와 소원을 이루기 위한 ‘내 마음대로의 예배’였다면, 유월절은 ‘언약책에 기록된 대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말씀을 내 형편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말씀에 맞추는 것이 참된 예배입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착하고 잘해서 심판을 피한 날이 아닙니다. 애굽에 마지막 재앙이 임하던 밤, 하나님은 문설주에 발린 어린 양의 피를 보시고 그 집을 넘어가셨습니다. 그 집에 죽음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어린 양이 대신 죽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월절은 “내가 잘해서 살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어린 양의 피 때문에 내가 살았다”는 구원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오랜 세월 동안 이 유월절을 잊고 살았습니다. 사사 시대를 지나 여러 왕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히스기야 때에도 어렵게 유월절을 회복했지만 완전하지 못했습니다. 요시야에 이르러서야 남유다뿐 아니라 이미 망한 북이스라엘의 백성들까지 품으며 온 공동체가 함께 여호와 앞에서 유월절을 지키게 됩니다. 산당을 제거하기 위해 떠났던 요시야의 길이 결국 예루살렘의 예배 자리에서 끝난 것입니다. 요시야는 말로만 예배를 회복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유도 내어 놓았습니다. 역대하 35장을 보면 백성을 위하여 어린 양과 염소 삼만 마리와 수소 삼천 마리를 유월절 제물로 내놓았고, 이를 본 지도자들과 백성도 기쁨으로 동참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은 결국 우리의 시간과 물질과 힘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통해 드러납니다. 지도자가 먼저 희생하고 부모가 먼저 믿음의 본을 보일 때 다음 세대도 그 모습을 보고 따라갑니다. 또한 유월절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을 다음 세대에 전하기 위한 절기입니다. 자녀가 “왜 교회에 가야 해?”라고 물을 때 단순히 교회에 가야 복을 받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정은 어린 양 되신 예수님의 피로 구원 받았기 때문에 예배드리는 것”이라고 구원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요시야가 어떤 상황에서 유월절을 지켰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미 나라에 재앙이 임하고 하나님의 진노가 꺼지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예배드리면 언젠 가는 내가 원하는 대로 상황이 바뀔 것이다.”라는 조건부 예배가 아니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때와 방법대로 상황이 바뀌지 않아도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신 분이시기에 예배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그대로이고, 자녀가 그대로이고, 질병과 사업과 물질의 문제가 그대로 일 수 있습니다. 기도했는데도 상황이 바뀌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그대로여도 또 하나 변하지 않고 그대로 인 것이 있습니다. 어린 양의 피로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사건이 그대로여도, 내가 원하는 응답이 아직 보이지 않아도 우리는 그래도 예배합니다. 우리가 잘해서가 아니라 어린 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적용 질문"오늘은 예배 좀 쉬자"할 때는 없습니까? 내가 드리는 예배는'기록된 대로'입니까, '편한 대로'입니까? 자녀가"교회는 왜 가야 해?"하고 물으면 나는 무엇을 말해 줄 수 있습니까?2. 그래도 말씀대로 삽니다. 요시야는 유월절 예배를 회복한 것으로 끝내지 않았습니다. 열왕기하 23장 24절을 보면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신접한 자와 점쟁이와 드라빔과 우상과 모든 가증한 것을 다시 하나씩 제거합니다. 예배를 회복한 왕이 이제 삶의 구석구석까지 말씀 앞에서 정리해 가는 것입니다. 그가 그렇게 한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성전에서 발견한 책에 기록된 율법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 요시야는 자기 생각이나 감정대로 개혁한 것이 아니라 말씀에 기록된 대로 살려고 했습니다. 입으로 세운 언약과 결심이 결국 몸이 되고 삶이 된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은혜받는 데서 멈추지 않고 실제 삶의 변화로 이어지는 것이 참된 순종입니다. 성경은 이런 요시야를 두고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이라고 평가합니다. 앞서 언약을 세울 때는 마음과 뜻을 다하겠다고 했는데, 마지막 평가에는 “힘을 다하여”라는 말이 하나 더 붙습니다. 신명기 6장 5절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말씀처럼, 요시야의 신앙은 마음과 생각에만 머물지 않고 실제 힘을 사용하는 자리까지 나아갔습니다. 그의 시간과 물질과 소유가 하나님을 향해 움직였습니다. 역대하 35장을 보면 자신의 소유 가운데 많은 제물을 내어놓았고, 그 모습을 보고 방백들과 백성들도 즐겁게 동참했습니다. 결국 내가 무엇을 사랑하는지는 말보다 내 시간과 돈과 손과 발이 어디로 가는 지를 보면 드러납니다. 우리도 은혜받고 결심하고 눈물 흘리는 데까지는 잘 갑니다. 그러나 막상 힘이 들어가는 자리에서는 멈출 때가 많습니다. 시간이 아깝고, 돈이 아깝고, 몸을 움직이는 것이 힘들어서 순종을 미룹니다. 하지만 참된 믿음은 마음과 뜻에서 끝나지 않고 힘까지 가는 것입니다. 말씀 앞에서 결단했다면 이제 실제로 움직여야 합니다. 관계를 정리해야 한다면 정리하고, 끊어야 할 습관이 있다면 끊고, 섬겨야 할 사람이 있다면 손과 발을 내어 놓아야 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모르는 내 마음속에 남아 있는 욕망과 집착까지 말씀 앞에 내어 놓아야 합니다. 특히 요시야의 순종이 더 귀한 이유는 나라의 재앙이 이미 예고된 뒤에도 순종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원하는 결과가 보여야 힘을 내고, 응답이 와야 순종하겠다는 것은 순종이라기보다 하나님과의 거래가 될 수 있습니다. 요시야는 하나님이 주시든 주지 않으시든, 상황이 좋아지든 그대로이든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그를 여기까지 이끈 것도 결국 성전에서 발견된 말씀이었습니다. 그 말씀이 우상을 부수게 했고, 예배를 회복하게 했고, 마침내 그의 삶 전체를 순종으로 이끌었습니다. 말씀은 우리를 결심의 자리에서 멈추게 하지 않고 반드시 삶의 자리로 데려갑니다. 그러므로 사건이 그대로여도 우리는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배우자가 변하지 않고, 자녀의 문제가 풀리지 않고, 사업과 건강의 상황이 그대로여도 그것이 불순종의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말씀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옳으시고 그 말씀이 진리이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내 신앙이 마음과 뜻에서 멈추고 힘까지 가지 못한 자리는 어디인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시간입니까, 돈입니까, 손과 발입니까. 말씀 앞에서 이미 결단했지만 아직 순종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눈에 보이는 것은 정리했지만 아무도 모르는 마음의 자리에 남겨 둔 우상은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상황이 변하지 않아도, 결과가 보이지 않아도 우리는 그래도 말씀대로 삽니다.적용 질문내 신앙이'마음과 뜻'에서 멈추고'힘'까지 가지 못한 자리는 어디입니까? 시간입니까, 돈입니까, 손과 발입니까? 말씀 앞에서 결단해 놓고 아직 순종하지 않은 것은 무엇입니까? 보이는 것은 정리했는데, 아무도 모르는 자리에 남겨 둔 것은 무엇입니까?3. 그래도 하나님이 옳으십니다. 요시야에 대해 성경은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으로서 전에도 후에도 그와 같은 왕이 없었다고 최고의 평가를 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26절은 뜻밖에도 “그러나”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요시야는 돌이켰지만 하나님은 유다를 향한 진노를 돌이키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요시야가 부족하게 회개한 것도 아닙니다. 그는 산당을 제거하고 우상을 깨뜨렸으며 유월절을 회복하고 자신의 소유까지 내어 놓으며 전무후무하게 돌이켰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미 말씀하신 심판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은 일을 만납니다.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예배하며 큰 적용까지 했는데 배우자가 그대로이고, 자녀도 그대로이고, 건강과 사업과 물질의 문제도 그대로 일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내가 이만큼 했는데 이제는 바꿔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라며 하나님께 결과를 요구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요시야의 이야기는 내가 원하는 결과가 오지 않아도 그래도 하나님이 옳으시다고 고백하는 것이 참된 회개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진노를 돌이키지 않으신 이유에 대해 성경은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그 모든 격노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 우리는 금세 “그러면 내 잘못이 아니라 저 사람 때문이구나!”라고 생각합니다. 부모 때문에, 배우자 때문에, 자녀 때문에, 누군가의 잘못 때문에 내 인생이 이렇게 되었다고 말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그 말 뒤에 숨지 못하게 합니다. 므낫세 혼자만 범죄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도 그의 꾐을 받아 함께 악을 행했습니다. 왕이 눈에 보이는 우상을 제거할 수는 있어도 백성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우상까지 없앨 수는 없었습니다. 신접한 자를 없애도 그들을 찾아가고 싶은 마음은 남아 있고, 겉으로 관계를 정리해도 그 사람을 향한 욕망과 미련은 마음속에 남을 수 있습니다. 결국 문제의 뿌리는 밖에 있는 누군가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도 있습니다.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도 처음에는 “우리 조상들은 범죄하고 없어졌으며 우리는 그들의 죄악을 담당하였나이다.”라고 조상을 탓했습니다. 그러나 고난 가운데 말씀을 묵상하면서 마침내 “우리의 범죄 때문입니다.”라는 고백에 이르게 됩니다. 조상 탓으로 시작했던 기도가 결국 내 죄를 보는 자리까지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그래서 “저 사람 때문에 내 인생이 이렇게 되었다”는 질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는 지금 내 가족과 자녀에게 무엇을 물려주고 있는가?”, “나는 누구에게 므낫세가 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부모에게 보고 배운 성질과 욕심, 중독과 잘못된 가치관을 그대로 물려주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27절에서 하나님은 결국 북이스라엘을 물리치신 것처럼 유다도 물리치시고, 하나님께서 택하신 예루살렘과 자신의 이름을 두신 성전까지 버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성전이 있다고 저절로 사는 것이 아니며, 교회에 다니고 직분이 있다고 그것이 나를 구원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어떤 외적인 조건도 우리를 지켜 줄 수 없습니다. 지난 말씀에서 요시야가 산당을 “제거”했다면 이제 하나님께서 죄악 가운데 있는 유다를 자신의 앞에서 “물리치겠다.”고 하십니다. 내가 말씀 앞에서 산당을 제거하지 않으면 결국 그 죄가 나와 다음 세대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엄중한 경고입니다. 그렇다면 요시야처럼 최선을 다해 돌이켜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면 우리는 무엇을 의지해야 합니까? 여기에서 다시 유월절의 어린 양을 바라보게 됩니다. 요시야의 회개는 분명 참된 회개였지만, 그의 눈물과 순종이 죄의 값을 대신 치르는 피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유월절 밤 이스라엘의 집에도 죽음은 있었습니다. 다만 어린 양이 대신 죽었습니다. 성경은 그 어린 양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보여 줍니다. 바로 우리를 위해 희생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형벌과 언약의 저주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회개는 “내가 이렇게 많이 회개했으니 이제 하나님께서 바꿔 주셔야 합니다.”라며 자신의 눈물과 수고를 공로로 내미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는 내세울 것이 없음을 인정하고 어린 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 아래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피는 조상에게서 물려받아 반복해 온 헛된 행실에서도 우리를 속량하십니다. 부모에게 보고 배운 잘못된 성질과 습관, 욕심과 중독이 내 안에서 반복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다음 세대까지 계속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린 양의 보혈로 죄가 대물림되던 가정에 새로운 구원의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이제 내가 다음 세대에 물려주어야 할 것은 므낫세의 헛된 행실이 아니라 “우리 가정은 어린 양 되신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았다.”는 구원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가장 어려운 회개는 내가 돌이켰는데도 사건이 그대로일 때 드러납니다. “이만큼 회개했으니 이제는 바꿔 주셔야 합니다.”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끝내 내가 원하는 결과가 주어지지 않아도 “하나님이 옳으십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요시야는 심판이 철회된다는 약속을 받지 못했지만 끝까지 예배했고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옳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회개했는데도 상황이 바뀌지 않을 때 “왜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으십니까?”라고 원망하기보다 그 사건을 통해 내 죄를 보고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배우자가 그대로여도, 자녀가 그대로여도, 건강과 물질과 내가 간절히 기도한 사건이 끝내 그대로여도 어린 양의 피와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결과가 내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어도 우리는 고백할 수 있습니다. “주님, 제가 틀렸고 하나님이 옳으십니다. 내 회개와 수고가 아니라 어린 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만 의지합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100% 옳으십니다.적용 질문회개했는데도 바뀌지 않는 그 상황을, 나는 지금 어떻게 해석하고 있습니까? '저 사람 때문'이라고 말해 온 사건에서 '나 때문'으로 옮겨야 할 내 죄는 무엇입니까? 내가 다음 세대에 물려주고 있는 것은 므낫세의 헛된 행실입니까, 어린 양의 구원 이야기입니까?
<기도 제목>
A
1. 오늘 오후 4시부동산 형사고소에 대한 사항 진술하러 가는데 주님께서 제 입을 주관하시고 올바르고 담대할 수 있도록
B
1. 하나님과 말씀과 공동체를 지금과 같이 지속적으로 사모할 수 있도록2. 정규직에 채용되기 위한 최소한의 준비와 노력 해나갈 수 있도록3. 술, 담배 끊을 수 있도록
C
1. 공사 안전하게 마무리 될 수 있도록2. 여전한 방식으로 매일 주시는 말씀을 묵상하며 지낼 수 있도록3. 헤어진 여자친구의 마음을 위로해 주시기를4. 만남가운데 있었던 일을 분별할 수 있도록5. 과거의 일들을 돌아보며 자책하는 대신 자세하게 기록하도록
D
1. 부모님 구원2. 나가서 주일 지키며 무슨 일을 하면서 살지 도무지 감이 안 잡히는데 잘 찾을 수 있도록3. 불안함에 밤낮이 아예 바뀌었는데 영육 성전 잘 지키도록4. 상담과 매일큐티 함께하며 말씀으로 해석받고 나아가길5. 우선 남자친구와 서로와 스스로를 위해 각자의 자리에 잘 서 있도록7. 나라 구원
E
1. 이직을 하고자 이력서를 넣었는데, 현재 회사가 싫고자꾸 감사함보다는 불만이 올라와서 급하게 넣었는데그냥 지금 현재 있는 환경에 감사할 수 있도록2.. 계속 기도랑 감사가 안되는데 , 예배 회복을 위해3.. 다음주부터 대학 온라인 강의가 시작되는데, 공부가 힘들어서자신이 없는데 끝까지 마무리 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