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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16.(주일) 열왕기하 23:28-30 「그의 무덤에 장사하니」 김양재 목사님
오늘 읽을 하나님 말씀은 열왕기하 23장 28절에서부터 30절까지입니다. 제가 읽습니다.
28. 요시야의 남은 사적과 행한 모든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29. 요시야 당시에 애굽의 왕 바로 느고가 앗수르 왕을 치고자 하여 유브라데 강으로 올라가므로 요시야 왕이 맞서 나갔더니 애굽 왕이 요시야를 므깃도에서 만났을 때에 죽인지라
30. 신복들이 그의 시체를 병거에 싣고 므깃도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그의 무덤에 장사하니 백성들이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데려다가 그에게 기름을 붓고 그의 아버지를 대신하여 왕으로 삼았더라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요시야가 그의 무덤에 장사되었다고 합니다. 이 한 절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오늘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듣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요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가 난리죠. 오디세이 왕이 트로이 전쟁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데 10년이 걸리는 얘기예요. 관객은 3시간 가까이 지켜봐요. ‘그래서 이 왕이 어떻게 돌아오나?’ 그런데 오늘 요시야는 너무 빨리 돌아옵니다. 애굽 왕을 만나자마자 죽고 병거에 실려 돌아왔어요. 영화가 이렇게 끝났다면 관객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을 거죠. 참 허망해 보입니다.
“돌이키지 아니하시리라”, “이 성전을 버리리라” 하시더니, 불세출의 개혁자인 요시야가 도리어 너무 간단히 한 줄에 죽었어요. 그리고 그의 한 줄의 결론은 “그의 무덤의 장사하니”예요.
그런데 성경은 요시야가 어떻게 끝났는지만 보게 하지 않아요. ‘무덤’은 원래 덮는 곳이잖아요. 그런데 요시야의 무덤은 덮은 것보다 드러낸 것이 더 많아요. 묻힌 것은 한 왕인데 드러난 것은 요시야만이 아닙니다.
이 무덤 앞에서 무엇이, 누가 드러납니까? 첫째로,
1. 말씀과 맞선 나입니다(28-29절)
말씀과 맞선 나 ‘요시야’, ‘말씀과 맞선 나’가 드러납니다.
28절이에요.
28. 요시야의 남은 사적과 행한 모든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_왕하 23:28
본문은 요시야의 죽음을 말하기 전에 먼저 ‘기록’에 주목하게 해요. 본문의 ‘역대지략’은 지금은 사라진 왕실 기록인데요.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또 다른 기록 ‘역대하’를 남겨주셨어요. 열왕기가 짧게 기록한 이 죽음을 역대하가 해석을 해 줍니다. (열왕기에 맞춰서 짧게 설교하고 싶지만 두 번 다시 내가 역대하를 설교할 기회는 없을 것 같아 가지고^^; 열왕기상·하만 해도 이렇게 시간이 걸렸는데……) 그래서 이 요시야의 죽음을 역대하가 어떻게 해석해 놨는지 그걸 오늘 좀 보려고 해요.
그러니까 요시야도 모르는 ‘남은 사적과 행한 모든 일’을 하나님은 이 생명책에 기록하시고 지금까지도 우리가 알게 해 주십니다. 나도 모르는 나의 남은 사적과 행한 일은 여러분, 어떻게 기록이 될까요?
29절이에요.
29. 요시야 당시에 애굽의 왕 바로 느고가 앗수르 왕을 치고자 하여 유브라데 강으로 올라가므로 요시야 왕이 맞서 나갔더니 애굽 왕이 요시야를 므깃도에서 만났을 때에 죽인지라 _왕하 23:29
애굽의 왕 바로 느고가 유브라데 강으로 올라갑니다. 그런데 우리 지금 성경은 “앗수르 왕을 ‘치고자 하여’” 그렇게 번역을 했는데요. 당시 상황은 느고가 무너져 가는 앗수르를 ‘도우러’ 가던 길이었어요. 그런데 ‘치고자 했다’고 이렇게 번역했잖아요. ‘치고자’는 대적하는 거잖아요. 그죠? ‘치고자’는 히브리어 전치사 ‘알’의 <개역개정> 번역인데요. 이 ‘알’이라는 전치사는 긍정 부정으로 다양하게 쓰이기 때문에 <새번역 성경>은 ‘돕고자’로 제대로 (번역)해놨어요. 그리고 <바른 성경>은 ‘가려고’(라고) 중립적으로 그렇게 다양하게 번역이 되어 있는데요. 그러니까 ‘치고자’는 사전적, 문자적인 의미라고 하면은 ‘도우려고’는 그 역사적인 지식의 역량으로 ‘우리가 돕는 게 맞겠다’ 이렇게 해석을 하잖아요.
이 말을 제가 왜 하냐 하면은, 사실 성경 저자의 관심은 ’사실 전달‘에만 있는 게 아니고요. 역대기나 열왕기 저자가 애굽 왕 느고의 역할에 대해서는 도우러 갔는지~ 치러 갔는지~ 관심이 없어요. 오직 ‘요시야가 구속사의 주인공이고, 왜 갑자기 죽었는가’에만 관심이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가 주님을 만나야 예수님으로 이어지는 해석을 할 수가 있고, 그것을 ‘구속사적’이라고 하고 우리에게 의미를 가져다주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사건이라도 그 사건은 영감받은 역사가에 의해서 ‘해석’이 될 때 의미를 발휘하게 되는데요. 그러므로 항상 사건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예를 들면, 제 시집살이 자체가 여러분한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죠? 노예였던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했다는 것이 사실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성령에 감동된 저자에 의해서 이 출애굽이 유월절로 해석이 된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 사건의 모형이 되기 때문에 이 출애굽 사건이 사람을 살리는 놀라운 해석이 된 거죠. 그러니까 해석이 너무 중요한 거예요. 근데 성경 저자도-감동을 받은 저자도- 이렇게 저렇게 다 해석을 해놨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띵크(THINK)를 하는 게 중요한데, 그러니까 제 남편과 제가 결혼한 것이 제 남편이 저를 ‘치려고’ 했는지 ‘도우려고’ 했는지 이것보다 중요한 것은 ‘제가 결혼해서 주님을 만났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결혼이 된 거잖아요. 그죠? 또, 제 남편이 하루 만에 갑자기 갔지만 한 사람의 죽음을 넘어서 ‘많은 사람을 천국 문으로 입성시키는 죽음이 되었기 때문에’ 중요한 죽음이 된 거예요. 우리 남편의 죽음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죠? 그러니까 이제 예수님하고 연결이 되니까 이것이 중요한 결혼이 되고 중요한 죽음이 된 거예요.
사건의 사실을 정확히 아는 것은 필요하지만 그러나 사실을 다 안다고 그 사건의 뜻까지 아는 건 아니란 말이죠. 우리를 살리는 것은 성령께서 이 사건을 어떻게 해석해 주시는지를 듣는 거예요. 그래서 사건은 ‘해결’보다 ‘해석’이 아주 중요한 거예요. 그것을 오늘 내게 주시는 음성으로 듣는 것이 바로 ‘큐티’고요. 성경은 이렇게 읽어야 성경이 나를 읽고 가는 거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우리는 또 생각을 해 봐요. ‘요시야가 그러면 왜 그랬을까?’ 그죠? 항상 구속사는 ‘상대방이 왜 그랬을까?’ (생각해 보는 것이에요.) 이 성경 저자도 한 사람은 ‘치고자’ 하고 한 사람은 ‘돕고자’ 하고. 이렇게 해석을 하니까 우리의 사건도 각자 자기 믿음의 분량대로 해석을 다 따로따로 하는 거예요.
그렇지만 우리는 시대 상황과 역사적인 것, 이런 모든 것들을 생각해서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봐야 하는데, 당시에 앗수르는 끝나가고 바벨론은 무섭게 일어나고 있었어요. 앗수르의 니느웨가 함락이 된 뒤에도 앗수르의 잔존 세력이 하란에 망명 정부를 세워 가지고 지금 버티기를 하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애굽 왕 느고는 유다를 치러 온 게 아니라 바벨론을 치려고 북쪽으로 지나가려 했어요. 왜냐하면 삼파전이에요. 바벨론, 앗수르, 애굽. 삼파전에서 앗수르가 무너졌잖아요. 그러니까 애굽은 이제 이 앗수르 휘하에 들어 있던 여러 가나안 민족을 바벨론이 먹을 거니까 자기가 걱정이 된 거죠.
그래서 앗수르를 도와서 바벨론을 치려고 지금 이렇게 된 건데 요시야가 그 길을 막아선 거예요. 왜 막아섰을까요? 요시야는 아마도 앗수르가 다시 일어서는 게 싫었겠죠.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원수 나라잖아요. 그런데 요시야는 북이스라엘도 한 나라로 품었단 말이죠. 형제 나라로. 그리고 애굽이 커지는 건 더욱더 싫어요. 요시야가 누구예요? 유월절 신앙을 회복한 장본인이잖아요. 출애굽의 은혜를 누구보다 기억하고 기념한 사람 아니겠어요? 그러니 애굽도, 앗수르도 용납이 안 되는 거예요. 요시야가 애굽 왕 느고와 맞서 나갈 명분은 아주 차고 넘쳤어요. 그런데 성경이 묻는 것은 ‘요시야의 외교적 판단이 옳았느냐?’ 이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말씀이 왔을 때 들었느냐’ 이거예요.
역대하 35장 21절을 보시면, 느고는 요시야에게 분명히 말했어요.
“유다 왕이여 내가 그대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내가 오늘 그대를 치려는 것이 아니요 나와 더불어 싸우는 족속을 치려는 것이라. (바벨론이죠.) 하나님이 나에게 명령하사 속히 하라 하셨은즉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그대는 하나님을 거스르지 말라 그대를 멸하실까 하노라.”
이게 누구 말이에요? 애굽 왕 바로의 말이에요. 놀랍게도 바로가 ‘하나님 명령을 받았다’고 해요. “내가 유다와 싸우려는 것이 아니니까 하나님을 거스르지 말라”고 경고를 해요. 그런데 이 말을 요시야는 어떻게 들었을까요? “바로 네가? 어떻게 네 입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나와 그게 말이 돼?!” 요시야는 정말로 인정할 수가 없었을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역대하 35장 22절에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떠나기를 싫어하고 오히려 변장하고 그와 싸우고자 하여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므깃도 골짜기에 이르러 싸울 때에”
요시야가 어떻게 했다고 해요? “듣지 아니하고.” 기가 막힌 말이에요.
요시야가 어떤 사람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을 사반이 읽어도(왕하 22:8), 훌다 여선지자가 전해도(왕하 22:15) 너무너무 차별하지 않고 잘 들은 사람이에요. 그러니 하나님도 놀라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왕하 22:19) 하는 응답까지 받았는데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옷을 찢고, 그냥 물었던 왕이에요.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바로 느고 앞에서 그 들음을 ‘스톱’했어요. 멈췄어요. 왜 멈췄을까요?
가장 잘 들었던 왕도 자기가 인정할 수 없는 통로로 말씀이 오자 듣기 싫었겠죠. 우리도 강단에서 하는 말은 너무 은혜인데, 남편이 밥상에서 하면 짜증이 팍 나요. 목자가 말하면 듣겠는데 아내가 하면은 같은 말도 안 들어.
요시야도 그랬을 거예요. ‘그게 바로 말이지 하나님 말씀이 아니잖아요?’ 이럴까 봐 성경이 분명히 말하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이라고요. 이상한 표현이에요. ‘느고의 입에서 나온 하나님의 말’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은데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이라고 하니까요. 그만큼 강조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바로 입을 통해 말씀하셨다는 것을 확실히 하는 거예요.
그 자리에서 요시야가 어디까지 알아들었는지 성경은 말해주지 않지만요. 우리가 이렇게 문자적으로만 명령을 들으면 안 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밖에서도 계시하시고 명령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우리가 알았어야 해요. 그런데 요시야의 유대 중심의 편협성이 하나님의 뜻과 명령을 지금 방해하는 거죠.
그래서 요시야가 어떻게 해요?
“떠나기를 싫어하고 오히려 변장하고 그와 싸우고자 하여”
요시야는 훌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무시하는 훌다 여선지자의 말을 들을지언정 전 세계가 우러러 받드는 애굽의 대왕 바로는 싫어요. 그러니까 우리 유다에서 보기에 요시야는 너무 멋있지 않아요? 와, 저 여자 말은 듣는데 지금으로 말하면 트럼프, 시진핑의 말은 쫙 안 듣는 거예요. 하나님을 빙자한 유대 중심의 편협성이 이렇게 요시야에게도 있는 거예요.
느고의 말을 아니라고 부정을 해서 맞서 싸웠지만 “하나님 입에서 나왔다”고 하니까 요시야가 찔리는 게 있는 거예요. 그래서 왕복을 벗고 얼굴을 가리고 남들이 알아보지 못하게 변장을 했어요. 여러분, 아무렇지도 않았다면 왜 변장을 하겠어요? 띵크를 해보세요. 그죠?
옷은 바꾸었지만, 옷을 바꿀 게 아니라 마음을 바꿨어야 했는데요. 마음을 돌이키지 않고 변장을 했어요. 옷을 바꿔 입었지만 길은 바꾸지 않았어요. 아무리 이방인이라도 내가 싫어하는 시어머니, 상사라도 그 입에서 하나님의 그 말이 하나님 입에서 나온 말일 수가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싫어하는 감정을 변장을 하고 직장과 부부와 고부 간의 여러 인간관계에서 싸우고자 하는 것을 상대방은 알 때가 많아요. 항상 선입견을 버리고. 자, 안 믿는 사람이, 안 믿는 남편이 날마다 틀린 소리만 해도 한 번 옳은 소리 할 때가 있거든요. 예, 그럴 때는 즉시 최상의 찬사를 보내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요걸 분별을 못하는 거죠. 요시야가 애굽 왕 느고를 지금 무시하잖아요. 그러니까 무시하는 거를 다들 옆에서 “어우, 대단하다!” 우러러보는 거예요. “저 애굽 왕 느고를 무시하는구나!”
그런데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무시하면서 변장은 왜 해요? 이거 앞뒤가 안 맞는 거 아니에요? 그러면 왕복을 딱 입고 나가서 싸웠어야죠. 그러면 사실 안 죽었어요. (헷갈리죠?) 차라리 물어보기라도 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요.
요시야는 이전에 훌다에게 사람을 보내 하나님의 뜻을 물었던 왕이에요. 당시에는 예레미야도 활동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다시 물었다는 기록이 없어요. 왜죠? 아마 애굽에 대한 태도만큼은, 앗수르에 대한 마음만큼은 물어볼 필요조차도 없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이건 나라를 위한 마음이고 신앙을 위한 적용이라고 확신했을 테니까요. 명분이 너무도 강하니까요.
우리가 일본이라는 통로로 오면은 우리는 안 들어. 그죠? 그런 거예요. 그런 고정관념이 딱 있는 거지. 요시야의 마지막은 그래서 “듣지 아니하고”로 끝났어요. 듣다가~ 듣다가~ 마지막에 “듣지 아니하고”로 끝났어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므깃도 골짜기에서 싸우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열왕기는 이것만 딱 기록을 해요.
저는 열왕기하고 역대하를 보면서 ‘열왕기는 역사서의 진보가 아닐까?’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
근데 이게 바로 함정이에요. 여러분 똑똑하고 착하고 훌륭한 사람들이 더 빠지기 쉬운 함정이에요. 많이 회개하고, 많이 적용하고, 많이 섬긴 우리 ‘-지기’들 있잖아요. ‘-지기’들 봉사자들, 사역자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에요. 이미 너무 많은 일들을 물으면서 통과해 왔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생기는 확신들이 있어요. 바로 이 확신이 결국 한순간에 주님의 말씀과 맞서게 하는 거예요. ‘내가 너무너무 지금까지 큐티 다 해왔어. 내가 그걸 모르겠어?’ 요시야는 불순종하겠다고 나간 것이 아니에요. 느고가 나쁜 놈이고, 게다가 아주 호전적인 왕이라 그래요. 예. 그러니까 자기는 순종한다고 확신했는데, 이제 어느새 말씀과 ‘맞서고’ 있었어요. 어제의 순종을 오늘의 정답으로 우기면 순종이 자기 의가 되고 말아요. 그래서 정말 우리 끝까지 깨어 있어야 되는데.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해할 수 없는 사건 앞에서 “왜요?” 하고 묻는 것이 잘못은 아니죠. ★문제는 말씀이 왔는데도 그 통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듣지 않는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가 고른 통로로만 말씀하지 않으세요. 그러니 사건 앞에서 ‘왜 이런 일이 왔지? 누구 때문이지?’만 계산하지 말고, ‘지금 내가 어떤 말씀과 맞서고 있는지?’ 띵크해야 되는 거예요. 이게 들어야 될 말인데. 그 상황으로 들어가면 우리도 다 요시야같이 생각할 것 같아요. 요시야가 진짜고, 느고가 말해서 그 말을 듣는다면 매국노같이 생각을 할 거라고 생각을 할 것 같아. 어떻게 느고가 “너는 여기 전쟁에 끼어들지 말라.” 그러면 우리가 다 자존심이 상하지 않겠어요? 만약에 저 일본 왕이 “내가 너를 치러 가는 게 아니고 저기 중국을 치러 가며 한국을 지나만 갈 테니 (임진왜란 때도 그러고 그랬잖아요) 길을 비켜라.” 그러면 그때 딱 비켜주면, 우리가 이제 그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을 안 할 거 아니에요? 그죠? 선조가 아주 너무 이상한 왕이잖아요.
적용 질문
Q. 하나님이 지금 내게 ‘듣기 싫은 통로’를 통해 하시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하여튼 똑같은 말도 아내가 말하면 안 들어~ 며느리들은 시어머니가 말하면 안 들어~ 이런 게 다 있잖아요, 딱 싫은 사람이.
Q. 사람을 골라 가며 듣고 있지는 않습니까?
Q. 말씀에 찔렸을 때 내가 하는 변장은 무엇입니까?
이게 방어 기제가 있잖아요. 그죠? 내가 막 두려우면 막 떠드는 게 있고.
Q. 바꾸는 시늉만 하면서 끝까지 고집하는 ‘내 길’은 무엇입니까?
그래서 이제 요시야의 무덤 앞에서 누가 드러나요? 말씀과 맞선 내가 드러나요.
2. 놓지 않으시는 하나님입니다(30a절)
두 번째는 놓지 않으시는 하나님-그럼에도 놓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있어요.
30a. 신복들이 그의 시체를 병거에 싣고 므깃도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그의 무덤에 장사하니……_왕하 23:30a
열왕기는 이렇게 이 기가 막힌 불세출의 영웅의 죽음을 딱 한 절로 조용히 기록하는데, 역대하가 그 마지막 장면을 역대하 35장이 21절에서 27절까지 길게 보여주고 있어요.
자, 23절 24절이에요.
23. 활 쏘는 자가 요시야 왕을 쏜지라 왕이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가 중상을 입었으니 나를 도와 나가게 하라 24. 그 부하들이 그를 병거에서 내리게 하고 그의 버금 병거에 태워 예루살렘에 이른 후에 그가 죽으니 그의 조상들의 묘실에 장사되니라 온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이 요시야를 슬퍼하고_대하 35:23-24
요시야가 변장을 했잖아요. 변장을 안 했으면 느고가 요시야를 죽일 마음이 없었잖아요. 그래서 도리어 안 죽었을 거예요. 근데 변장을 했기 때문에 궁수들의 화살에 맞았어요. “내가 중상을 입었으니 나를 도와 나가게 하라” 성경에 기록된 요시야의 마지막 말이에요. 이 한 번의 판단 미스로 그렇게 요시야는 므깃도에서 치명상을 입고 죽었어요. 마흔도 되기 전에 39살에 너무도 갑작스럽고 처참한 죽음을 맞았어요.
우리는 여기서 따지고 싶어요. “아니, 한 번 그거 안 들었다고 그렇게 죽음까지 갑니까? 아니, 그렇게 악한 왕 므낫세는 55년을 다스리다가 자기 동산에 묻혔는데, 이렇게 가장 선한 왕이 어떻게 전쟁터에서 이렇게 갈 수가 있어요?” 우리의 질문이에요.
여러분, 세상에는 100번 잘못해도 안 걸리는 사람이 있고, 한 번 어긋나도 바로 걸리는 사람이 있어요. 여러분은 누가 부러우세요? 안 걸리는 사람이요? 그러면 하나님이 수준 높게 보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한 번 잘못해도 딱 걸리는 사람이에요. 하나님께 많이 받고 많이 맡은 사람은 한 번의 어긋남도 그냥 두지 않고 다루세요. 그것이 수준의 대우예요. 수준 차예요. 뭐든지 잘 되는 사람은 우리들교회에서는 그렇게 얘기하잖아요. “어머, 수준이 아주 낮으신가 보네~” 버리신 것이 아니라 그만큼 가까이 두고 다루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아모스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뭐라고 하셨어요?
“내가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너희만을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하셨나니”(암 3:2)
‘너희만 알았으니’ 봐 준다가 아니고요. “너희만을 알았기 때문에 너희 죄를 하나도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아는 만큼! 맡은 만큼! 엄하게 다루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 죄와 변장이 걸리는 건 저주가 아니에요. 하나님이 나를 더 잘 아시고 내게 더 맡기셨다는 증거예요. 그런데 이걸 또 공식으로 만들면 안 돼요. “야! 한 번 실수하면 하나님이 죽이셔~” 이게 공식이 또 아니에요. 법칙이 아니에요.
요시야는 성경이 그 까닭을 직접 보여준 아주 특별한 경우죠. 요시야가 하나님께 반역하겠다고 전쟁터에 나간 게 아니라고 했어요. 확신이 눈을 가려서 끝내 깨닫지 못한 채 맞섰던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걸 모르셨겠어요? 물론 징계는 징계대로 임했어요. 징계는 징계대로 임했지만, 그러나 징계가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은 아니었어요.
30절 다시 보세요.
“……그의 시체를 병거에 싣고 므깃도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그의 무덤에 장사하니”
오늘 설교 제목이죠. 담담한 기록이에요. 근데 이 조용한 문장이 사실은 ‘약속의 성취’인 거예요. 22장에서 훌다를 통해서 주신 약속이 뭐였어요?
열왕기하 22장 20절에
“……내가 너로 너의 조상들에게 돌아가서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내가 이 곳에 내리는 모든 재앙을 네 눈이 보지 못하리라”
이게 그대로 이루어졌어요. 요시야는 예루살렘이 불타는 것을 보지 않았어요. 조상들에게 돌아갔고 자기 묘실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왕들이 어떻게 됐는지 보세요. 아들들이 애굽 땅에서 죽고, 바벨론으로 끌려가고, 두 눈이 뽑히고……. 전부 요시야의 아들, 손자가 전부 이렇게 죽었어요. ‘자기 무덤에 장사되었다’고 기록된 마지막 유다 왕이 요시야였어요.
그래도 마음에 걸리실 거예요.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라” 하셨는데, “전쟁터에서 화살에 맞아 죽은 게 무슨 평안입니까?” 이렇게 생각하실 수 있어요. 이 긴 장을 우리가 다 풀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거 하나는 분명해요. 그의 죽음은 약속의 취소나 버림이 아니었어요. 무덤도 약속 밖은 아니에요.
백성들이 어떻게 하는지 보세요. 역대하 35장 24절, 25절을 보시면 여호람은 아끼는 자 없이 죽었지만은 요시야는 온 유다와 예루살렘이 울었어요. 똑같은 왕이 죽어도 여호람 왕은 아끼는 자가 하나도 없어요. 모든 백성들이 “잘 됐다~ 잘 됐다~” 이러는데 요시야는 온 유다와 예루살렘이 울었어요. 예레미야가 애가를 지었고, 그 애가가 규례가 되어 오늘까지 불렀다고 해요. 이건 시켜서 운 울음이 아니에요. 북받쳐서 주체할 수 없어서 운 울음이에요. 생각해 보세요. 55년 므낫세의 그 악정을 지나서 2년 아몬을 지나서 그 캄캄한 시대를 지나온 백성들에게 요시야가 어떤 왕이었겠어요? 더운 날에 생수 한 사발 같은 왕이었단 말이에요. 그 왕이 시체가 되어 병거에 실려 돌아왔으니 지금 온 나라가 통곡하는 거예요. 이 통곡은 맞는 통곡이에요. 역대기는 요시야의 일생을 이렇게 정리하는데요. 26절이에요.
“요시야의 남은 사적과 여호와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행한 모든 선한 일과”(대하 35:26)
요시야의 “듣지 아니하고”를 쓴 바로 그 손이 마지막 평가에는 “모든 선한 일”을 썼어요. 이건 단지 착한 일, 좋은 일이 아니에요. 이것은 헤세드- 신실한 일, 충성된 일, 헌신한 일-이에요. 마지막 그 한 걸음의 실족이 요시야 평생의 신실을 지우지는 못한다는 거예요. 여러분, 그러니까 하나님이 놓지 않으신다는 것은 언제나 죽음을 막아주신다는 뜻이 아니에요. 그보다 훨씬 더 깊은 뜻이에요. ★죽음조차 약속 밖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신다는 거예요.
요시야가 잠시 말씀을 놓쳤어도 하나님은 요시야를 놓지 않으셨어요! 우리가 금요일 큐티에서 읽으셨죠? “오직 내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오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천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신명기 7장 9절에 나오죠? 그러니까 므깃도에서도, 장례 행렬에서도, 무덤 앞에서도 하나님은 언약을 신실하게 이행하고 계셨던 거예요. 하나님은 실족한 자의 장례식에서도 약속을 지키고 계세요.
가족을 갑작스럽게 보내고 지금도 큰 슬픔 가운데 계신 분들이 있죠. 왜 그때였는지, 왜 그런 모습이었는지. 우리는 다 알 수가 없어요. 함부로 이유를 붙이지도 말아야 돼요. 우리가 겪은 모든 죽음에 성경이 “이래서 일어난 일이다” 이 설명을 해주지는 않아요. 그러나 모르는 것이 전부는 아니에요. 슬픔이 그 죽음의 마지막 해석이 아니에요. 그분이 주님의 사람이었다면, 사람의 눈에 아무리 억울해 보여도 아무리 이해가 안 되는 일이라도 성도는 살아도 주의 것이고 죽어도 주의 것이에요. 요시야의 죽음은 하나님이 내리신 축복이에요. 그 죽음은 주님 손 밖으로 떨어지지 않아요. 그래서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아도 이 모든 것을 느끼고 누리지만 안 믿는 사람은 재앙이 올까 봐 두렵고 재앙이 오면 해석하지 못해 슬픈 거예요.
산당 예배를 드리는 것이 재앙이 올까 봐 산당 예배를 드리다가 산당 예배를 열심히 드려도 재앙이 오면 해석하지를 못해서 다 슬픈 거예요. 그리고 “왜!! 이런 일이……!!”를 부르짖는 거죠?
그러니까 평소에 이렇게 묻는 큐티를 하지 않다가 여러분들 남편이 갑자기 죽고 부도가 나는 사건이 왔는데 그때 큐티를 딱 책을 펴면 깨달아지겠어요? 성경 한 번도 안 보던 사람이! 구속사를 읽지도 않던 사람이! 그 사건이 왔을 때 깨닫기 위해서 평소에 큐티가 필요한 거예요.
그러니까 에스겔 20장 1절에서부터 3절 말씀처럼 “이제 전쟁이 나기 전에 제발 예루살렘 성전이 얼마나 더러운지-네 성전이 얼마나 더러운지-깨달아라! 말씀을 들어라!” 하는데 이 사람들이 안 들었잖아요? 드디어 망했잖아요? 망하니까 장로 두 사람이 에스겔한테 와서 “우리가 망했어요! 망했어요! 어떡할까요?” 그러니까 “너희가 내게 물으려고 왔느냐?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하노니 내가 묻기를 용납하지 아니하리라!” 그러셨잖아요, 하나님이. “너희가 내게 묻기를 용납하지 아니하리라”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은 ‘깨달아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갑자기 사건이 왔는데 성경이 흰 거는 종이고 까만 건 글씨. 깨달아지질 않아요.
어떤 이제 갑자기 목사님이 소천하신 사모님이 이제 목세에 오셨어요. 제 남편도 갔다고 그러니까. 그래서 오셨는데 이 사모님께서 제 간증이 3박 4일 동안 하나도 자기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이러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해석이 안 되어서 해결이 안 되는 거예요.
큐티는 사모님이래서 사역자가 돼서 잘하는 게 아니고. 자기가 해야지. 자기가 하고 평소에 해석하는 거를 습관을 삼아야 되는데 그래도 양육을 받아보겠다고 하셨으니까 저는 그 양육을 통해 꼭 들리셨기를 기도하는데요.
그런가 하면 멀리 호주에서 쌍둥이 아들을 의료 사고로 잃었던 목사님은 이 문제가 19년 동안 해석이 안 되었다가 이번에 해석이 되셨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러니까 이제 내 사건, 똑같은 이렇게 사건에서 천차만별로 해석하니까 한쪽은 두렵고 한쪽은 누리고 그러는 거예요. 사건이 나야 실상이 드러나잖아요.
저야말로 그야말로 청상과부인 거 아니에요? 그런데 청상이 되어서 지금까지 누리고 여기까지 왔잖아요. 다음 주가 대구 목세예요. 정말 대구와 경상도에 계신 목사님들은 서울까지 못 오시니까 이 대구성명교회에 꼭 참석하셔서 이 구속사와 소그룹의 위력을 좀 맛보시길 바라요. 경상도 파이팅입니다! 지금까지 300명 정도 신청하셨다고 들었는데 그 교회가 크니까 더 와도 돼요.
Q. 내 인생에서 ‘왜?’가 풀리지 않은 그 사건을, 무엇으로 해석하고 있습니까? 내 감정입니까, 기억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입니까?
Q. 내 죄와 변장이 드러난 것을 저주로만 여깁니까, 나를 놓지 않고 다루시는 은혜로 받습니까?
결혼할 때도 변장 많이 하죠. 그죠? 다 그냥 조금 조금 다 속이고 또 속이고 속여서 결혼해요. 여러분 속이지 않으면 결혼이 됩니까? 속였으니까 되는 거죠. 그러니까 그런 걸 가지고 막 큰일이 난 것처럼 이러시면 안 되는 거예요. 요시야도 변장하는데~ 당연히 우리가 변장하죠. 그러니까 이 하나님 없는 사람한테는 기대를 할 게 하나도 없어요. ‘드러난 게 감사하다’ 이렇게 봐주고 이제부터 이제 해석을 같이 해나가야죠.
Q.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을 겪는 지체 곁에서 나는 이유를 붙이고 있습니까, 함께 울고 있습니까?
요시야의 무덤 앞에서 말씀과 맞선 내가 드러났다고 그랬어요. 그래도 하나님과 맞선 것 같아도 하나님은 나를 놓지 않으신다고 그러네요. 이거 얼마나 감사해요? 그죠? 행위로 천국 갈 사람이 없어요. 세 번째는
3. 대신 죽으신 참 왕입니다(30b절)
여기서 대신 죽으신 참 왕이 드러나는 거예요. 이 사건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거죠. 대신 죽으신 참 왕. 30절을 이어서 봅니다.
30b. …… 백성들이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데려다가 그에게 기름을 붓고 그의 아버지를 대신하여 왕으로 삼았더라_왕하 23:30
그러니까 백성들이 급해요. 이 ‘백성’으로 번역된 이 ‘암하레츠’라는 이 용어는요, 아달랴 당시 종교 개혁의 선봉장 여호야다에 호응하여 유다 각처에서 모여든 사람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어요. 당시 그들이 바알 신전을 파괴하고 바알 제사장을 죽인 것을 보면 이들은 나름대로 역사의식과 행동력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음을 알 수 있죠. 근데 이제 이들이 나름 괜찮았던 이들이 요시야의 장례가 끝나기가 무섭게 아들 여호아하스를 데려다가 기름을 붓고 왕으로 삼았어요. 이 마음이 이해가 되죠. 뭐 왕이 하루 만에 죽었으니까 나라가 흔들리면 안 되잖아요. 하루라도 빨리 그 자리를 채워야죠. 그래서 왕위 계승 서열조차 다 무시하고 맏아들이 아닌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추대했어요. 아마 이들은 여호아하스가 다른 형제들보다 아버지 요시야를 계승하여 나라를 부강시킬 수 있는 뛰어난 자질이 있는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에 여호아하스를 추대했을 거예요. 이 여호아하스는요, 반란을 겪고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기름 부음을 받았는데 이렇게 반란 후에 정통성 강조하기 위해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 솔로몬, 요아스, 여호아하스까지 딱 3명밖에 없는 그 마지막 왕이에요. 그래서 여호아하스는 모두의 추인을 받고 기름 부음도 받았어요. 왕관도 받았어요. 다윗의 보좌도 받았어요. 그리고 성경이 가장 높이 평가한 아버지까지 자기 아버지로 둔! 이 대단한 받을 수 있는 건 다 받았단 말이죠. 근데 이 왕이 어떻게 됩니까? 딱 석 달 천하! 석 달 만에 애굽으로 끌려가서 거기서 죽어요. 기름 부음이 그 인생을 책임져주지 못했어요.
여러분 이스라엘이 왕을 어떻게 세웠는지 기억하세요? 하나님께 떼 부려서 왕을 구한 거 기억나시죠? “우리도 다른 나라들처럼 왕이 있어야 된다고!!” 정복 전쟁을 해 가지고 다 이기게 해줬더니. “내가 병만 고쳐주면 예수 믿겠다! 예수 믿겠다!”고 해서 병 고쳐줬더니 “돈 내놔라. 돈 내놔라!” 하는 거예요. 돈 줬더니 “우리 애 합격시켜라. 합격시켜라.” 산당 예배의 주제가 끊임없이 달라지는 거예요.
하나님께 떼를 너무 부리니까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8장 7절에 이러는 거예요.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삼상 8:7) 그러니까 하나님이 다 해줬는데 자꾸 “왕 달라고 왕 달라고” 하니까 하나님 자리에 다른 왕을 달라고 하니까. 분노함으로 왕을 주고 진노함으로 폐했다(호 13:11) 그러시잖아요. 이제 진노함으로 폐할 날이 이제 가까워 오는 거예요. 문제는 왕이 있었다는 게 아니에요. 보이는 왕을 달라는 거죠. 보이는 왕을 하나님 자리에 세운 거예요. 그리고 그 왕정의 역사가 어떻게 끝나갑니까?
가장 훌륭한 왕 요시야도 백성의 마음까지는 돌이키지 못했어요. 성전을 수리하고 산당을 다 제거하고 유월절 예배를 성대하게 드려도 백성은 회개하지 않았어요. 예레미야 3장 10절에도 유다가 그때 진심으로 돌아온 게 아니라 거짓으로 할 뿐이라고 나옵니다. 요시야 다음 왕이 된 아들들은 한결같이 다 악을 따랐어요. 그리고 지난주에 봤잖아요. 하나님이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다고 해요. 왜죠? 므낫세의 꾐에 넘어간 백성이 함께 쌓아온 악의 시절이 너무 길어가지고. 보이는 왕을 하나님 자리에 세우사 왕의 죄가 백성의 죄가 되었고, 그 악이 마침내 평범성이 되어 온 나라를 심판으로 끌고 갔어요. ‘악의 평범성’의 나라가 되었어요. 이게 누구 얘기겠어요? 백성이 구원해 달라고 세운 왕들이 도리어 백성을 멸망으로 끌고 간 거예요. 사람 왕은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할 수도, 끝까지 지킬 수도 없어요. 그것이 너무 익숙하게 자리 잡아서 아무리 개혁을 해도 도로 제자리라는 거예요. 우상은요, 나에게 그 신이 되는 거잖아요, 하나님이 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우상을 섬기면요, 죄의식이 없어요. 왜냐하면 그게 하나님이니까. 성공 신을 섬기면 성공만 하면 되니까 성공을 위해서 못할 게 없는 거예요. 자녀를 매질하고 때려도 가책이 없어요. 성공을 하면 되니까. 그게 신이에요. 하나님이에요. ‘어휴, 저 여자가 왜 저러나’ 가책이 있으면 그러겠어요? 가책이 없어서 그러는 거예요. 지금 성공의 하나님을 섬기고 있기 때문에. 그걸 몰렉 우상이라 그러잖아요. 자녀를 불 가운데 지나가게 해도 가책이 없는 거예요. 더 나아가서 우리는 하나님 자리에 금송아지를, 이 성전에 금송아지가 있는데 그 금송아지를 놓고 다 비는 거예요. 성전에 와서 금송아지를 놓고 빌기 때문에 “돼요~ 돼요~ 다 돼요~” 만 부르짖어요. “돼요~ 돼요~ 다 돼요~”만 부르짖어요. 우리도 똑같지 않아요? 목사가, 목자가, 배우자가, 부모가, 자녀가, 지도자가 나를 구원해 주기를 계속 기도하는 거예요. 보이는 사람을 하나님 자리에 세워놓고 그 사람이 나를 구원해 주기를 바래요. 그래서 그 사람이 무너지면 하나님까지 무너졌다고 난리를 치는 거예요. 사람을 믿으니까. 왕 때문에 망했어요, 이스라엘이. 왕 중에서 딱 한 사람 요시야 왕이 전에도 후에도 그런 사람이 없었다고 그러는데 그러면 요시야가 뭘 했나? 이 요시야가 왕인데 왕 노릇을 안 한 왕이 딱 한 사람밖에 없는 거예요. 그 권력과 그 권세를 가지고 왕 노릇을 안 한 사람이 요시야 한 사람인 거예요. 그러니까 남·북이스라엘이 권력과 권세와 재물을 주니까 다 그거를 자기를 위해서 썼어요. 그래서 “왕은 널 압제하고 착취할 뿐이다” 말해도. 그래도 왕 달래. 보이는 왕. 보이는 왕.
한 목자님 나눔이에요. 큰딸이 “이번에도 떨어지면 하나님을 안 믿겠다”고 하나님을 협박하듯이 말해 가지고 ‘아휴, 제가 어떡하나~ 좀 붙어야지~ 아휴, 좀 하나님 믿겠다고 그러는데’ 그런데 기적적으로 좋은 회사에 합격했대요. 그러고 나니까 완전히 자유로워져서 이제 우리들교회도 떠났대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기도를 안 들어주시면 ‘하나님을 안 믿겠다’고 그러고, 들어주시면 이제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그러는 거죠. 그러니까 그런 얘기는 들을 필요가 없어요, 우리는. “이거 한 번만 들어주면 내가 교회 나갈 거야.” 그딴 소리를 불쌍하게 여기고 우리가 눈물로 기도를 해야 되는 거지. 그러니까 여러분들 “한 번만 붙게 해주세요. 우리 애가 교회 나온다고 그러잖아요.” 그런 걸 여러분들이 똑같이 산당 예배를 드리니까 일희일비하는 거예요. 애 말에 한 번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거예요. 아이가 하나님 자리에 있으니까. 보이는 아이가 하나님 자리에 있으니까 맨날 아이 놓고 비는 거죠. 그죠?
그런데 본문을 다시 보세요. “그의 아버지를 대신하여 왕으로 삼았더라” 대신하여. 여호아하스에게 허락된 ‘대신’은 ‘자리의 대신’이에요. 아버지가 비운 왕좌는 앉을 수가 있었어요. 그러나 아버지의 믿음을 대신할 수도, 백성의 죄와 심판을 대신 담당할 수도 없었어요. 왕좌를 대신할 왕은 있었지만 죄인을 대신할 왕은 없었던 거예요.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한 사람 요시야가 성군이었던 것은 그가 그 권력으로 왕 노릇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왕인데 그 권력. 북한에서 제일 무서운 죄는 김정은의 심기를 거스르는 죄가 가장 무서운 죄라고 그러네요. 가장 무서운 형벌. 그러니까 내가 누릴 수 있는 권력 이거를 안 쓰면 그 한 사람 위정자 요시야가 전 국민의 사랑을 받았잖아요. 그죠.
그래서 이제 하나님은 인간 왕정이 실패한 뒤에야 급히 다른 왕을 찾으신 게 아니에요. 그런데 하나님은 다윗에게 이미 약속하셨어요.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삼하 7:16). 그래서 마태복음은 예수님을 뭐라고 부르면서 시작해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마 1:1)
그 계보 속에 요시야도 계보에 있죠. 그죠? 그렇지만 예수님의 칭호는 ‘요시야의 자손’이 아니라 ‘다윗의 자손’인 거예요. 다윗이 어떤 사람이에요? 요시야처럼 흠 없는 사람이 아니에요. 오히려 많은 넘어짐과 무너짐과 깨어진 가운데 처절하게 회개한 죄인이에요. 다윗은 ‘죄인’이에요. 요시야는 너무 흠이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요시야처럼 살아? 못 살아!” 그죠? 절망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계보의 구속사의 가장 큰 주인공은 유다와 다윗이라고 그랬잖아요. 우리가 꺼내놓지도 못할 일이 죄악의 주인공들. 하나님은 흠 없는 인간 왕을 찾아서 구원의 약속을 이어가지 않으셨어요. 죄인을 향해 세우신 자기 언약으로 참 왕을 보내신 거예요. 그러므로 아합과 므낫세 같은 이런 악인도 회개하면 열조의 묘실에 받아주셨어요. ‘회개’가 너무너무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요시야는 빨리 갔어야 돼요. 요나단은 빨리 갔어야 돼요. 너무 흠 없는 사람은 이 땅에 오래 살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것도 저것도 비교하고 절망할 게 아니고 회개를 해야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왕은 요시야가 마지막에 멈춘 그 자리에서 멈추지 않으셨어요. 요시야는 마지막에 듣지 않았지만 이 왕은 죽기까지 들으셨어요. 죽기까지 복종하셨어요. ★하나님은 왕들의 무덤이 쌓여가는 역사 속에서 그 무덤을 이길 왕을 준비하고 계셨어요.
베드로전서 3장 18절에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대신하셨으니’ 여호아하스는 아버지의 왕좌를 대신했어요. 그러나 참 왕이신 예수님은 죄인의 자리를 대신하셨어요. 왕좌가 아니라 우리의 죄와 심판을 대신 담당하신 거예요. 요시야는 죽어서 자기 생애를 마쳤지만 예수님은 죽으셔서 우리의 죽음을 끝내셨어요. 요시야의 무덤 안에는 그의 시신이 누워 있었어요. 그러나 참 왕이신 주님의 무덤은 비었어요. 그리스도 안에서 무덤은 ‘끝’이 아니라 ‘문’이에요. 성도에겐 무덤이야말로 ‘천국 문’이에요.
생각해 보면, 저희 남편은 빨리 간 것이 그에게는 아주 축복이었던 것 같아요.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정말 정말 생각할수록 단 한마디도 “내가 왜 이렇게 죽어?” 이 말 한마디도 안 했어요. 정말 택자였나봐요. 그래서 저는 예수 믿고 천국에 가는 것이 남은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고, 축복이라고 생각을 해요. 우리 남편이 그렇게 예수를 믿고 확실하게 갔기 때문에 제가 이 40여 년 동안 이렇게 증인이 돼서 걸어오잖아요. 이거 억지로 이렇게 제가 살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죠? 제가 이 세상에 좋은 거 취할 수 있는 그 환경이 많이 돼 있잖아요. 그러나 예수 믿고 천국 가는 이것이... 그래서 우리가 우리 식구들의 구원을 위하여서 부지런히 댕기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T.T. 로 경상도도 가고 다 가서 거기 구원을 위하여서! 우리가 무슨 ‘큐티책~’이 아니고 구원을 위해서! 구속사 깨달아지라고! 내 집안에 구원이 일어난 사람은 다른 집안의 구원까지도 관심을 갖게 되는 거예요.
Q. 나는 누구를 내 인생의 왕으로 세우고 있습니까? 그 사람이 흔들리면 내 믿음까지 흔들리는 그 이름은 누구입니까?
Q. 나는 기름 부음과 직분, 신앙 경력이 나를 책임져줄 것처럼 살고 있지 않습니까?
Q. 나는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유일한 왕으로 모십니까?
이번에 우리 소년부 큐페는 1,300명이 왔다는 거예요. 요새 아이들이 교회 갑니까? 정말 대단합니다. 거기서 간증을 한 아이의 간증을 좀 읽어드릴게요. 얘네들도 와서 해석을 해요. 인생을 해석을 해요. 이 초등학교 아이들이 이렇게 해석을 해요.
저는 아빠 얼굴을 못 본 지 8년이 되었어요. 근데 어릴 때는 아빠가 왜 집에 오지 않는지 몰라 답답했고, 그리고 엄마까지 떠나실까 봐 늘 두려웠어요. 그런데 이제 초등학교 2학년 때 엄마 큐티 책을 우연히 보다가 간증문을 읽게 되었는데, 아빠가 베트남에서 새로운 가정을 이루고 아이까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너무 큰 충격이었고 아빠에게 배신감을 느꼈어요. 아무리 설명을 해주어도 저는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지금도 아빠를 생각하면 미운 마음이 올라오고 막 답답해요. 동생은 아직 상황을 몰라서 철없이 행동할 때가 많아서 답답하고 화가 나요. 그리고 또 제가 말을 좀 잘 안 들으면 할머니는 “아빠를 닮아서 저런다” 그러면 막 많이 무너졌고 그냥 상처를 받았어요. 그래서 이제 가족들과 함께 사는 것도 싫어서 이 집을 떠나 혼자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그러니까 이렇게 힘들다 보니까 저는 하나님보다 다른 것으로 마음을 달래려고 인터넷 쇼핑하면서 스트레스를 풀고, 좋아하는 아이돌 영상을 계속 보면서 현실을 잊으려고 했어요. 학교생활도 귀찮게 느껴져 지각을 하기도 했고, 교회 가기 싫어 일부러 준비를 늦게 할 때도 있어요. 하지만 아무리 쇼핑을 하고 아이돌 영상을 보아도 제 마음은 채워지지 않아요. 오히려 하나님과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되었어요. 이번 큐페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너희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라는 말씀을 묵상했어요. 처음에는 우상이라고 하면 저라는 우상만 생각했어요. 그런데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고 하나님보다 더 마음을 빼앗기는 것도 우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어요. 저에게는 쇼핑과 아이돌이 바로 그런 우상이었어요. 또 저는 ‘왜 나에게만 이런 가정을 주셨을까?’라며 가족을 원망하고 하나님께도 불평했어요. 하지만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 한 분만 붙잡는 믿음을 가르쳐 주고 계시다는 것을 조금씩 알게 되었어요. 우리들교회에서 늘 배우는 것처럼 ‘중요한 것은 사건이 아니라 그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라는 것도 깨닫게 되었어요. 이게 너무 놀랍지 않아요. 가족의 아픔은 저를 무너뜨리기 위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오도록 부르시는 사랑의 사건이라는 것을 믿고 싶습니다. 아직도 아빠가 밉고 가족들과 함께 지내는 것도 힘들어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저와 우리 가족을 포기하지 않으신 것처럼 저도 가족을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족들이 예수님을 만나 구원받을 수 있도록 기도하고, 동생도 사랑으로 품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너무 놀랍지 않아요. 그래서 여러분들은 이렇게 큐페를 보내서 다른 아이들의 간증도 아이들이 듣게 하고. 큐페 기간에 가족 여행 가셨나요? 그러니까 그 아이만도 못한 거죠. 정말 이건 금 주고도 이렇게 못 사는 하나님의 정말 이렇게 선물인데.
말씀을 맺어요. 그의 무덤에 장사하니 이 무덤 앞에서 누가 드러납니까? 첫째, 말씀과 맞선 나죠. 그런 나를 놓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에요. 그리고 이제 대신 죽으신 참 왕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죠. 내가 아무리 어둠에 있을지라도, 실수했을지라도, 제 자신을 부인해도 주님의 선하심으로 나를 뒤쫓으시며 인도하시고 지켜주신다고 하시는 거예요. 신실하신 하나님이 내 안에 있기 때문에.
요시야 찬양을 지난 주일에도 했는데 이거 다시 좀 해야 될 것 같아요. 이게 이런 마음으로 가사가 쓰여진 거예요. 하나님이 이제 참으로 ‘running after me[러닝 애프터 미]’. 이제 뒤쫓으면서 나를 도와주시고 지켜주신다는 거예요. 찬양하고 기도할게요.
♬주님의 선하심♬
사랑해요 신실하신 나의 주님
나의 삶 주님 안에 있네
눈을 뜨는 아침부터 나 잠들기까지
오 선하신 주를 노래하리
신실하신 나의 주님
나의 삶을 인도하셨네
나의 모든 호흡 다해
사랑해요 나를 인도하신 주님
고난 중에도 나와 함께 하셨네
내 아버지 되시며 내 친구 되신 주
주님의 선하심이 날 인도하시네
주님의 선하심이 날 지켜주시네
주께 엎드려 나의 모든 삶
주님께 드리네
기도 제목
내가 아무리 어둠에 있을지라도, 실수했을지라도, 내 자신을 부인해도 주님이 이렇게 날 뒤쫓으시면서 인도하시고 지켜주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놓지 않으신다고 해요. 어떤 사건에서도 말씀과 맞서지 않게 해달라고! 끝까지 나를 놓지 마시라고! 나를 위해 죽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참 왕이신 것을 믿게 해달라고. 어제는 81주년 광복절이었어요. 나라가 없으면 우리가 예배를 드릴 수가 없잖아요. 이 나라를 지켜주시라고! 주님이 이제 끝까지 우리를 뒤쫓으시면서 우리를 우리나라를 인도해 주실 걸 기도하시고! 다음 주에 열릴 대구 목세를 위해서! 그리고 언제나 기도해야 될 다음 세대를 위해서! 악법은 막아주시고 생명법은 통과되게 해달라고! 다 같이 주님 부르고 기도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성경 최고의 성군인 요시야의 죽음을 오늘 묵상을 했습니다. 여지없이 날마다 구속사를 주님은 알려주십니다. 그가 좌로 우로 치우치지 아니했고, 요시야 전에도 후에도 그런 왕은- 그렇게 여호와의 말씀을 들은 왕은- 없었다고 한 이 요시야가 마지막에 하나님 입에서 나온 말을 “듣지 아니하고” 변장을 하고 이렇게 화살에 맞아 끝냈어요.
주님, 이렇게 우리가 되었다 함이 없고, 우리는 마지막까지 방심할 수가 없고. 이것을 어떻게 분별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선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저는 요시야가 말씀 안에 약속 안에 그 죽음이 결코 주님이 버리시는 사건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가 죽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생각하면 이제 이 수고를 그치고 쉬라고 하시니까 너무 기뻐하면서 갔을 것 같아요.
저희 남편은 이렇게 갑자기 간 것이 수고를 그치고 쉬라는 것이었는데, 저는 죄가 많아서 아직까지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 주시옵시고.
주님, 우리의 죽음이 오래 살고 적게 살고가 정말 하나도 의미가 없고, 예수 그리스도가 내 인생에 들어왔는가 주인인가 아닌가, 항상 죽든지 살든지 우리의 삶이 의미가 있고 누리고 느끼는 것이 되는 이 모든 사건이 되어 해석이 되어서 모든 사람들에게 줄 것만 있는 우리들의 삶이 될 수 있도록 주여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누구도 정말 대단한 사람이 없고, 아닌 사람이었고, 므낫세도, 아합도 회개해서 자기의 묘실에 들어갔다고 했사오니 오늘 우리가 회개하는 인생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회개만 하면 주님이 받아주시는 줄 믿습니다! 주여,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게 도와주시옵소서! 회개의 운동이 일어나게 도와주시옵소서! 우리나라를 향하여서 아버지 하나 안타까워만 할 것이 아니고 이제 회개의 운동이 우리들교회부터 일어나게 도와주시옵소서!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나라가 없으면 예배를 어찌 드리겠습니까? 주여, 불쌍히 여겨주시고 지켜주시고 인도하여 주시옵시고, 하나님이 뒤쫓아오시면서 지켜주신다고 하셨사오니 우리를 지키시고, 우리 가정을, 나라를, 우리의 모든 아버지 하나님 삶을 지키시고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이렇게 요시야의 그의 무덤에 장사됨을 듣고 느껴서 신앙고백으로 드린 우리들의 헌금을 흠향하여 주시옵시고, 내 사랑하는 주님께 드릴 것만 있고 사람들에게 줄 것만 있도록 저희들의 회사와 산업과 공부와 프로젝트와 아이디어와 물질과 건강과 인간관계에 주여! 기름을 철철 부어 주시옵소서. 오늘 특별히 처음 오신 아버지의 모든 새가족 분들이 아버지 하나님 참으로 힘든 사건을 가지고 이 자리에 왔사오니 주여! 주님이 찾아가시고 안수하여 주시고 고쳐주시고 살려주시옵소서!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도와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주님이 뒤쫓아오십니다!”
“죽어지고 썩어집시다!”
********* 기도제목 **********
A. 말씀에 맞선 저를 이기시고 설득하시고 양육하신 것을 기억하고 부활까지 갈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B. 말씀이 안 들릴 수 있음을 인정하며 매일 큐티로 마음을 다 잡기를 기도합니다.C. 말씀에 더 집중하며 기쁜 마음으로 주님의 일에 임할 수 있도록.D. 내몸을 하나님의 성전이라 생각하며 소중히여기고 관리하기E. 하나님이 길잡이가 되어 주시는 것을 믿고 세상 걱정을 덜어내고 맘 편히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번주는 카페에서 나눔을 길게 하였는데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매번 맛있는 식사를 대접 받으며, 목장에서 맛있는 음식으로 섬겨 주는 목자와 지체들이 있음에 감사합니다. 다른 목장에 가서도, 부부 목장에 가서도 음식으로 잘 섬겨야 겠다고 배우게 됩니다. 한 주도 잘 안 되겠지만, 주신 말씀으로 하루만 잘 살아내겠습니다. 가족 모임을 끝내고 늦게라도 합류한 목원분이 있어 든든합니다. 예배와 목장을 사수하겠습니다!
우리의 모든 아버지 하나님 삶을 지키시고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나라를, 가정을, 목장을 하나님이 뒤쫓아오시면서 지켜주신다고 하셨사오니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여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