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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21.(주일) 열왕기하 22:20-23:3 「언약을 세우되」 김양재 목사님
22:20. 그러므로 보라 내가 너로 너의 조상들에게 돌아가서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내가 이 곳에 내리는 모든 재앙을 네 눈이 보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사자들이 왕에게 보고하니라
23:1. 왕이 보내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장로를 자기에게로 모으고
2. 이에 왕이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매 유다 모든 사람과 예루살렘 주민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노소를 막론하고 다 왕과 함께 한지라 왕이 여호와의 성전 안에서 발견한 언약책의 모든 말씀을 읽어 무리의 귀에 들리고
3. 왕이 단 위에 서서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우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께 순종하고 그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이 언약의 말씀을 이루게 하리라 하매 백성이 다 그 언약을 따르기로 하니라
하나님 아버지, 오늘 언약을 세우라고 하십니다. 언약을 세우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인지 오늘 듣기를 원합니다.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여러분, 요즘 우리가 자주 하는 거짓말 중에 하나가 뭐가 있는가 하면, ‘읽었으며 동의합니다.’ 앱을 깔 때도 누르고, 회원 가입할 때도 누르고, 결제할 때도 이렇게 눌러요. 그런데 여러분, 정말 다 읽으세요? (어쩌면 이렇게 “아니요” 그래요.) 읽지도 않고 ‘동의합니다’를 눌러요. 무슨 내용인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내 정보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그냥 빨리 넘어가려고 동의합니다. 제가 그래요.
신앙도 이렇게 할 때가 많아요. 말씀은 제대로 듣지 않고 ‘아멘’ 합니다. 언약의 내용은 모르면서 ‘믿습니다!’ 합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내가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지, 어떤 말씀 앞에 서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그냥 ‘은혜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 회개한 요시야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읽지 않고는 동의하지 않아요. 듣지 않고는 ‘아멘’ 하지 않습니다. 백성을 모읍니다. 언약책의 말씀 모든 말씀을 들려줍니다. 그리고 그 말씀 앞에 함께 서서 언약을 세웁니다. 오늘은 말씀을 들은 회개는 어떻게 언약을 세우는지 본문을 통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언약을 세우되, 첫째는
1. 공동체를 하나님 앞에 모읍니다(22장20절-23장2a절).
22장 20절이에요.
20. 그러므로 보라 내가 너로 너의 조상들에게 돌아가서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내가 이 곳에 내리는 모든 재앙을 네 눈이 보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사자들이 왕에게 보고하니라_왕하 22:20
요시야에게 평안을 약속하시는 말씀이에요. “내가 너로 너의 조상들에게 돌아가서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하시는데요. 우리가 지금까지 본 열왕기에 나오는 모든 왕들의 죽음이 기록될 때 거의 모두 “자니라”고 했어요. 그런데 요시야만 믿음의 조상들에게 쓰였던 ‘돌아가서 들어가게 하리니’라는 표현이 쓰인 거예요. 이게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을까요?
‘돌아가서’와 ‘들어가게 하리니’는 원어로 같은 동사예요. ‘아사프’ 동사인데요. 그 뜻이 ‘모으다’예요. ‘모으다.’ 이 표현은 모세 오경에 자주 쓰이는데요.
아브라함, 이삭이, 야곱 다 이렇게 표현됐어요. 아론과 모세도 마찬가지고요. 하나님 백성에게 ‘죽음’은 하나님이 그 조상들에게로 모으시는 거라는 거죠. 버려지는 게 아니고요. 하나님 앞으로, 하나님의 백성에게로 모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에게 죽음은 ‘단절’이 아니라 ‘재회’예요. 모두 다 함께 다시 만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너무 이제 뭉클한 거예요.
‘구원의 확신’이라는 것이 하나님이 나를 죽은 후에도 하나님의 백성에게로 모으신다는 확신이라고 생각이 돼요. 우리 모두 그 자리에서 다시 만나기를 축복합니다!(아멘)
그러니까 이 확신은 신념과는 다른 거예요. 이 확신은 (요시야가) 율법을 듣고 마음이 부드러워져서 옷을 찢고 이제 통곡을 했잖아요. 그런데 무엇을 회개했나요?
얼마나 남유다와 자신이 크게 범죄했는지, 구체적으로 그걸 깨닫고 회개를 했기 때문에 그 회개를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셨다는 거예요. 이런 회개를 거의 본 일이 없으셔서 하나님께서 가뭄에 단비 보듯 반가워하셨다는 건데요.
그러니까 회개가 너무 중요해요. 이전에 요시야는 여선지자 훌다에게 사람을 보냈는데, 훌다가 뭐라 그러냐면 ‘내가 이 곳을 향하여 내린 진노가 꺼지지 아니할 것이고…… 이곳은 황폐해지며 그 주민은 저주를 받으리라’는 심판의 말씀을 받았잖아요(왕하 22:16~19). 다만 요시야는 그 재앙을 자신의 눈으로는 보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도 함께 받았어요.
그러니까 끊임없는 재앙 얘기가 성경에서 나오지만 끝까지 하나님께 묻는 자는 하나님도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하시면서 하나님이 의논하시는 거예요.
이런 비슷한 말씀을 들은 히스기야 왕이 있었잖아요. 그도 ‘쌓아 두었던 것이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아들 중에서 바벨론의 환관이 되리라’는 말씀을 들었어요(왕하 20:17~18). 그리고 히스기야도 ‘네가 사는 날 동안 태평과 진실이 있겠다’는 말씀을 들었는데(왕하 20:19), 이제 두 왕의 반응이 달랐어요.
아쉽게도 히스기야는 마지막에 회개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는데요. 똑같이 나라의 멸망과 개인적으로는 평안의 예언을 들었지만은 하나님께 물었던 요시야는 이제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의 심판을 돌이킬 수 없다고 해도 자포자기하지 않았다는 거죠. 이거는 무슨 뜻이에요? 이게 그때의 얘기로만 들으면 우리하고 상관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예배 열심히 드리고 큐티 열심히 하고 회개해도 내 옆에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렇게 얘기하셨어요. “그 사람은 멸망할 거야. 안 돌아와” 이렇게 얘기를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뭐, 됐어’ 이러고 끝날 거예요? “회개하는 자는 끝까지 최선을 다하고, 최선을 다하는 자는 재앙을 보지 않는다!” 이 뜻이에요.
(23장) 1절이에요.
1. 왕이 보내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장로를 자기에게로 모으고_왕하 23:1
그러니까 요시야는 재앙의 말씀을 듣고도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실제로 보여주는데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인 거예요.
그래서 요시야가 장로들을 지금 모읍니다. 무슨 뜻입니까? 쉽게 말하면 (22장) 20절에서 하나님이 요시야에게 “내가 너를 모으겠다” 이러시니까 요시야는 “그러면요, 저는 백성을 모으겠습니다” 이거예요. “하나님이 나를 모으시니까 저는 사는 날 동안 백성을 모으겠습니다”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모으심을 받은 사람은 가만히 못 있어요. 모으는 사람이 돼요. 하나님이 은혜로 나를 모아주셨으니까 나도 누군가를 하나님 앞으로 모으게 되는 거예요. 이게 회개한 사람이에요. 회개는 하나님 나라로 모으는 거예요. 모으기 위해서 지혜를 동반하고 그 지혜는 (하나님께서) 타이밍을 알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나 나라는 망해도 요시야를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신다고 하니까 이걸 문자적으로만 듣고 ‘나는 괜찮지 않은가?’ 이러는 거예요. 히스기야는 약간 그랬던 것 같아요. ‘내가 사는 날엔 괜찮지 않은가’ 그래서 그 말을 선히 여겼다고 했잖아요. 이렇게 나라가 망해가는데도 ‘나는 최선을 다했으니까 괜찮지 않은가’ 하는 성도들이 너무 많다는 거예요!
그러면 말씀을 듣고 우리가 적용을 항상 해봐야 되잖아요? 인구 절벽이 1위가 될 나라이기 때문에 당연히 이 나라가 지금 2030 세대 수가 가장 떨어지고 있어요. 4050보다 유권자가 적겠죠. 그래서 이제 별로 신경을 안 쓴다는 얘기도 들었는데요. 이 저출산이 흑사병으로 죽은 인구 감소율과 거의 같은 감소율이라는 거예요. 이혼율과 자살률도 인구 절벽에 아주 한몫을 하는 거예요. 그래도 우리는 나만, 우리 세대만 괜찮으면 됩니까? 인구가 없어진다는데 동성애 막아야 하지 않아요? 낙태 막아야 하지 않아요? 그런데 다들 ‘나는, 이 세대는 괜찮지 않아?’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세계 10위권에 들어와서 K-pop, BTS, 이재가 전 세계를 지금 석권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괜찮지 않아?’ 하는 거죠. 정말 괜찮더라고요. 케데헌이 꼭 우리들교회 교인 같아요. 거절당하는 자에게 바치는 노래 ‘골든(Golden)’은 아카데미상까지 받았는데, 어떻게 그렇게 나라 사랑도 대단하고 소감 얘기하면 눈물을 흘리고 그러니까 이렇게 지금 한국이 영향력을 끼치고 있을 때 아이 많이 낳아서 선교해야 하지 않아요? 그런데 영향을 끼치면 뭐 해요? 인구가 없어지고 있는데. 인구 절벽은 지역과 진영과 세대 모두를 뛰어넘는 어마어마한 주제인 거예요. 괜찮지가 않아요!
지금 남유다도 손을 댈 수도 없이, 므낫세와 아몬에 의해서 57년간이나 우상숭배로 넘쳐나서 돌이킬 수 없는 심판의 때가 코앞에 왔다는 거예요. ‘그래도 여전히 나만 괜찮으면 되지 않아?’ 이게 유다 백성의 가치관이에요.
그런데 괜찮지 않아요. 괜찮지 않으면 어떻게 해요? 지혜가 필요하잖아요. 나만 구원받는다고 기쁜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변하지 않는 심판받을 식구들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는 이제 천국 가는 그 시간까지 애통하다가 가야 하는 거예요.
실제로 저희 남편은 진짜 죽기 3시간 전에 주님을 영접을 한 거예요. 3시간 전에 영접했다고 제가 평생 이렇게 기쁘게 사는 거예요. 이건 기적이에요. 그렇다면은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하루의 날이 얼마나 안타까운 날들인지 아시겠죠?
결국 제가 남편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했다는 게 뭐예요? 제 회개를 해야 된다는 거죠. “구원! 구원!” 그러면 구원이 됩니까? 그러니까 제가 회개를 하니까 지혜를 주셨고, 구원의 타이밍을 알려주셔서 그 새벽에 남편이 영접을 하도록 역사하신 거죠. 그러니까 그는 구원받고 하나님의 집에서 모일 것을 우리에게 영원히 확정하고 갔어요. 이게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이제 하나님의 시간표를 보면, 요시야가 39세에 죽었어요. 그러면 지금이 아주 지금이 하나님의 시간표로 보면 정말 안타까운 날들의 하루인 거예요, 지금. 요시야가 알고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런데 회개를 하게 되면 내가 노느라고 미워하느라고 원수 갚느라고 복수하느라고 시간 낭비를 할 틈이 없어요.
그렇다고 또 내가 급해서 회개를 부르짖는다고 옆에서 회개가 되나요? “얘, 너 회개해!” 그래서 회개가 돼요? 바늘허리에 매어서 못 쓰죠. 요즘 저도 바늘귀에 실을 꿰려면 너무 힘들어요. 그러나 꿰어야 바느질을 하잖아요. 아무리 급해도 그 바늘구멍 같은 한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부터 해야 되는 거예요. 개인 구원이 이루어져야 사회 구원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사회 구원부터 이루어지는 건 없어요, 우선순위가.
그런데 이제 ‘장로들부터 모았다’고 그랬잖아요. 장로는 가문과 지역을 대표하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회개는 나 혼자 마음 한 번 찡하고 마는 개인 감정이 아니에요. 온 공동체가 함께 참여할 ‘공동체적 사건’이라는 거죠.
다윗처럼 환난당하고 빚지고 원통한 자들 400명이 모여서 시작한 하나님 나라는 다 원통하니까 다윗 말을 너무 잘 듣잖아요. 환난당하고 빚진 자가 모아졌으니까. 그런데 지금 나라의 틀이 500년 동안 내려와서, 솔로몬 막 다 이러니까 이 사람들이 지금 우상숭배를 하고 있잖아요. 이럴 때 조심해야 되는 거예요.
우리들교회도 맨 처음에 두 달 만에 (휘문고) 식당부터 시작해서 왔는데 처음에 이 여자 목사가 하는데 얼마나 힘든 사람들이 왔겠어요. 그러니까 너무 말씀을 잘 듣고 우리끼리 너무 좋았는데 요즘에는 유명해져서 온 사람들도 있잖아요. 그죠? 그러니까 말씀이 안 들리는 거예요. 정말 (여기에) 저의 슬픔이 있는 거예요. 그렇다고 제가 기뻐하는 사람들하고만 할 수도 없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여기 이 힘든 곳은 지도자부터 지금 모은 거예요, 요시야가. 큐티 목회를 하려면 장로님들부터 설득을 해야 되는데요. 장로님들을 어떻게 설득하나요? 신뢰가 쌓여야 하잖아요. 그럼 신뢰는 어떻게 쌓이나요? 이전에 이렇게 요시야의 회개가 있었다는 거예요. 그 회개 후에 요시야가 이제 말씀을 듣고 옷을 찢었지만 나라가 망한다고 생각을 하니까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했을 거예요. 그러니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회개. 그러니까 이 요시야의 말보다 회개와 통곡의 진정성이 장로들에게 보인 거예요. 이건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신 일이에요. 내가 이 회개를 보이겠다고 해서 보여지는 게 아니에요. 그러므로 중요한 거는 하나님은 속일 수 없는 그 진정한 회개예요.
그러니까 이제 제가 항상 내 얘기니까. 남편의 구원을 위해서 생명을 내놓았는데 생명이 두 개예요? 한 개밖에 없는 생명을 내놓았으니까 저도 오늘이 마지막이잖아요. 그 마지막이라는 종말론적인 생각을 그때부터 했어요. 그러니까 이제 그런 마지막이라는 마음이 저절로 들었고, 그런 마음으로 이 장로들을 모으듯이. 오늘이 마지막이니까 “아무것도 안 하고 놀자”가 아니고, 이제 스피노자가 말했듯이 “내일 지구가 망한다고 해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그것이 되더라고요. 하나님의 백성으로 죽어도 하나님께서 모으시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죠. 이제 이런 확신이 드는 사람은 내가 이제 갈 곳이 정해졌잖아요. 근데 그곳이 너무 좋은 곳이기 때문에 그곳으로 다 같이 가고 싶은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이 땅에서 그래도 이제 인정받는 자리에 있는데, 내가 그거보다 더 좋은 것이 있다는 것을 설명해 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이 땅에서도 남들이 부러워할 것들을 좀 보여주게 하셨는데. 그러니까 내가 가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모음을 받는 그곳에 너무 같이 가고 싶은 거예요. 너무 좋으면 저절로 소개하고 싶잖아요. 그죠? 그런데 망한다는데 ... 너 남편도 죽고 망한다는데 ”그럼 다 끝이야.” 이러고 가만히 있으면 내 하나님 나라로-갈 곳으로- 모음을 받지 못한 자예요. 모음받은 자는 마지막까지 이렇게 모으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여러분은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예수 믿고 천국에서 모이자”고 유언을 하셔야 돼요. “예수 믿고 천국에서 모이자!” 마지막에 “너 이 사람하고 결혼해~” 이런 게 유언이 되면 안 돼요. 그래서 그 말하지 말고 애들 보고 “예수 믿고 천국에서 만나자! 예수 믿어야 된다!” 이 얘기를 하라고 그러는데 못하시더라고요, 그분이. 학벌이 너무 좋으셔 가지고. 그래서 학벌 좋은 며느리하고 꼭 결혼을 해야 된다고 아들한테 얘기를 하는데 제가 옆에서 “예수 믿고 구원받아야 된다”고 그 얘기하라고 했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결국 그 자매하고 결혼했는데 이혼을 했어요. 그러니까 “예수 믿고 천국에서 만나자” 이건 굉장한 유언인 거예요. 2절에
2. 이에 왕이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매 유다 모든 사람과 예루살렘 주민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노소를 막론하고 다 왕과 함께 한지라 ……_왕하 23:2a
그러니까 요시야가 진짜 회개를 했어요. 그러니까 회개가요, 확산이 되는 거예요. 전염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모든 백성들이 전부 와 보라고 그러는 거예요. 와 보라고. “여기 모이자! 모이자!” 이건 이벤트도 프로그램도 아니고요, 요시야의 회개가 백성들을 불러 모으게 한 거예요. 모아서 어디로 갑니까? 요시야가 왕궁으로 올라가지 않았어요. ‘여호와의 성전’으로 올라갔어요. 공동체를 자기편으로 모은 게 아니고 여호와 앞으로 모았어요. 이게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사람을 내 밑으로 모으면 세력이 되고 패거리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회개한 사람은 사람을 여호와 앞으로 인도하는 거죠. 그런데 그동안에 이게 분별이 안 됐어요, 유다가. 그래서 서로 네 편 내 편 있잖아요. 므낫세 편 무슨 편.
요시야가 성전에 올라가매 어떻게 됩니까? 유다 모든 백성이 노소를 막론하고 다 함께 올라갑니다. 근데 “우리는 저 사람 안 돼. 저 집은 안 돼. 쟤는 어차피 안 올 거야” 이러면서 자꾸 예외를 만들어요. 자기를 또 예외로 둘 때도 있어요.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쟤도 안 되고 나도 안 되고. 이 회개가 안 돼서 분별이 안 되는 거예요.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 데는 예외가 없어요!
전도 주일에 보살님만 찾아다니던 한 친구에게 이제 “교회 가자. 내 소원이야.” 그리고 이제 한 번 얘기를 했다는 거예요. 굉장히 어렵게 얘기를 했어요. 그러다가 이제 수요일에-주일 전에 수요일에- 한 번 더 아주 그냥 너무너무 조심스럽게 “교회 갈래?” 그냥 이렇게 했더니 그 친구가 “기다렸어.” 그랬다는 거예요. (그거 두 번 안 했으면 어떡할 뻔했어요.) 기다렸어요. 그래 가지고 이제 주일날 오는데 그냥 친구가 부담 느낄까 봐 그냥 너무 조심하고 말씀이 들리기만을 기도하면서 사실 그러다 보니까 친구한테 신경 쓰니까 무슨 설교를 들었는지~ 하셨는지~ 기억도 안 나고 오직 ‘연애’ 두 글자만 기억이 나는데 영접 시간에 또 이제 너무 떨려서 친구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그래서 영접 시간 다 끝나고 보니까 친구가 일어나 있더라는 거예요. 이후에도 자발적으로 등록하고 다 사진도 찍었어요.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이 친구가 “우리들교회 조금만 일찍 왔더라면 이혼하지 않았을 수 있겠어.” 그랬다는 거예요. 그리고 “목장은 몇 번 가는 거야? 어떻게 하는 거야? 나도 오늘 간증한 분처럼 하면 되는 거야? 매일 보살님만 찾아다니다가 친구가 전도해 가지고 이제 하나님께 물어보기 시작했다고 그렇게 간증하면 되는 거야?” (얼마나 잘 들었어요.) “우리 애들이 나한테 말은 못해도 이혼으로 인한 상처가 클 텐데 아이들이 공동체에 속해서 나에게 하지 못하는 말을 나누고 갔으면 좋겠어.”
여러분 정작 전도한 집사님은 ‘연애’ 워딩(단어) 밖에 설교가 기억이 안 나는데 생판 생짜 친구가 이런 반응을 보였으니까 전도를 왜 해야 되는지 아시겠죠? 제가 괜히 애통하는 게 아니에요. 한 번 와서 들으면 온 집안이 지금 살아나잖아요.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주님이세요. 이 요시야의 회개는 신·불신 간에 성경을 하나도 모르는 사람까지 모두 함께 올라가는 기적을 다 이룬 거예요. 막판이-마지막 때가- 되니까 이런 일이 일어났어요. 그러므로 회개보다 확실한 전도는 없는 것 같아요.
여러분이 정말 내 옆에 식구가 변화되기를 원하려면은 여러분이 회개하셔야 돼요. 그게 답이에요. 별의별 뭐 앞에 사탕발림을 다 해도 회개하셔야 되는 거예요. 누가 말하기 이전에 회개를 하니까. 자발적으로 여호와의 전에 “우리 교회에 한번 와 보라”고. 자발적으로 자발적으로. 그러고 이제 와 보라고 하니까 온 분이 또 등록을 하고 회개가 너무 중요해요.
근데 이제 더 그보다 중요한 게 내가 누구를 모으기 전에 내가 먼저 모여야 해요. 하나님이 우리를 교회로 모아주셨잖아요. 그런데 정작 우리 마음은 … 이게 모여 있는지 돌아봐야 돼요. 몸은 목장에 와 있는데 마음은 안 모여 있는 거예요. 예배의 자리에 앉아는 있는데 마음은 여전히 내 행복과 고난, 내 이익과 손해로 지금 흩어져 있어 가지고… 지금도 이제 이 말씀이 안 들리는 분들이 있죠. 우리 마음이 공동체로 먼저 모여 있어야 하는 거예요.
여러분의 회개는 어디서 멈춰 있어요? 그냥 주제가 “나만 평안하면 돼. 나만 은혜 받으면 되지 뭐” 여기서 멈춰 있지는 않습니까? 그건 아직 회개가 나한테서만 맴돌고 있는 거예요. ★진짜 말씀을 들은 회개는 “나 혼자 평안하면 괜찮아” 여기 머물러 있지 못해요. 옆에 있는 내 배우자, 내 자식, 내 부모, 내 목장 식구, 내 이웃을 자꾸 여호와 앞으로 끌어당기게 되는 거예요. 이 한 사람의 회개가 공동체를 여호와 앞으로 부르는 거예요.
이 모음이 어디까지 갈까요? 요시야의 모음이 끝이 아니에요. 성경 전체가 하나님이 흩어진 백성을 모으시는 이야기예요. 아담이 하나님으로부터 흩어졌잖아요. 바벨에서 온 민족이 흩어졌어요. 그런 인류를 지금 하나님이 다시 모으시는 거예요. 우리 주님이 말씀하셨잖아요.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마 23:37).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로 모으시려고 자기 목숨을 내어주셨어요.
그러니까 말씀을 들은 사람은 혼자 평안하지 않아요. 공동체를 하나님 앞에 모읍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모여 있는 것도, 여러분보다 먼저 말씀을 듣고 여러분을 누군가 호호 불며 데려왔기 때문에 앉아 계시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제 여러분들도 이렇게 모으는 그 한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요시야의 회개가 확실하기 때문에! 회개가 확실하면요, 영혼 구원으로 나가게 돼 있어요. 가장 확실한 회개를 했기에 요시야가 이제 오늘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는 거예요.
그러므로 지도자 한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 또 이제 알게 되는 거예요. 제가 서 있어야 여러분이 서 있고. 여러분 가정에 가장이 서 있어야 돼요. 믿는 한 사람! 꼭 가장이 아니더라도 믿는 한 사람이 회개를 하면! ‘서 있는다’는 게 회개하는 거예요. 진짜 회개를 해야 되는 거예요. 옷을 찢고 통곡을 해야 되는 거예요. 내 죄에 대해서. 상대방 죄가 아니고. 그러면은 이제 각자 이제 적용할 것들을 다 생각을 좀 해 보시면 좋아요.
적용 질문
Q. 몸은 예배의 자리에 와 있지만, 마음이 흩어져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Q. "나만 평안하면 괜찮다”라는 생각으로 멈춰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Q. 내가 하나님 앞으로 모아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Q.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꼭 하고 싶은 유언이 무엇입니까?
이것(유언)도 준비를 해 두셔야지. 여러분들 이거 준비 안 해 두시면은 “너 이 사람하고 결혼해라, 너 이사 가라, 너 거기는 안 좋아” 이런 유언하고 가지 마시고^^;; 영원한 집에 초청하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아멘!
자, 언약을 세우되 첫째는 그래서 이제 공동체를 하나님 앞에 모으는 거예요. 두 번째는 이제 모았으면 뭐를 해요?
2. 언약책의 모든 말씀을 들려줍니다(2b절).
이제 말씀을 들려줘야 되는 거예요. 2절 이어서 봅니다.
2. …… 왕이 여호와의 성전 안에서 발견한 언약책의 모든 말씀을 읽어 무리의 귀에 들리고_왕하 23:2b
모아서 발견한 언약책의 말씀을 이제 모든 백성에게 들려줍니다. 누가요? 왕이요! 요시야 왕이 읽어줘요. 처음 이 책이 발견됐을 때는 서기관 사반이 왕에게 읽어 줬잖아요. 그땐 요시야가 ‘듣는 사람’이었어요. 근데 이제 백성에게 ‘읽어 주는 사람’이 됩니다. 말씀을 들은 사람이 말씀을 들려주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사실 이 새로운 게 아니에요. 모세가 이미 명령했던 일이에요. 신명기 31장 11절을 보면은 “이 율법을 낭독하여 온 이스라엘에게 듣게 할지니” 남자도 여자도 아이도 나그네도 모두 다 듣게 하라고 합니다. 왜죠? 듣고 배워 여호와를 경외하게 하려는 거예요. 요시야가 지금 이것을 회복하고 있는 거예요. 이 말씀대로 순종하려고 하는 거예요. 잊어버렸던 이 낭독을 다시 살려낸 겁니다.
그런데 요시야가 들려주는 게 뭐예요? 자기 생각이 아니죠. 자기 교훈도 아니죠. 언약책의 모든 말씀을 읽어요. 왕의 권위를 세우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권위로 세우는 거예요. 이게 회개한 지도자의 특징이죠. 자기가 권위자가 되는 게 아니라 말씀 아래 머무는 거예요. 요시야는 율법책의 말씀을 듣고 옷을 찢고 통곡했잖아요. 그러니까 와~~ 그냥도(율법책을 발견하기 전에도) 개혁을 하다가 말씀을 들으니까 말씀의 위력을 절감했어요. 그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에게 읽어 들리게 하는 일이었어요.
제가 모범생으로 교회 다녔잖아요. 그런데 이제 이렇게 힘든 일이 생기고 큐티를 하고 회개를 하고 해석이 되니까 살겠더라고요. 그러니까 만나는 사람마다 큐티를 하라고 말씀을 읽어 들리게 하고 싶었어요. 해 아래 새 것이 없어서 성경에 어떻게 이렇게 나하고 똑같은 일이 있는지 항상 놀랍더라고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요? 22장에서 ‘율법책’이라고 했던 책을 이제 ‘언약책’이라고 하잖아요. 책이 바뀐 게 아니에요. 기록된 말씀이 어떤 말씀인지가 나에게 해석이 되고 드러나기 시작한 거죠. 언약이 뭡니까? 그냥 지켜야 할 규칙 목록이 아니에요. 좋은 말 한마디가 아니에요. 우리를 하나님과 묶는 관계예요. 나를 하나님께 속하게 하고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 살게 하는 생명줄이에요. 율법이 율법으로만 들리면 부담이에요. 그런데 그 율법이 나를 살리시려는 하나님과 나를 묶는 언약으로 들리기 시작하면 그게 은혜인 거예요. 그러니까 말씀이 나에게 들려지니까 이제 율법이 아니고 성경이 나를 읽고 가게 되고 창조주가 말을 걸어 주기 시작하니까 와! 이 억울했던 것이 감당 못 할 시험이 없더라고요. 그리고 이제 고린도전서 나오잖아요. “시험 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내사”, 그 길이 ‘the way’에요. 정관사 붙어 가지고. 피할 길인 the way! 예수님이 거기 계시더라고요. 나를 살려준 예수님이 계시더라고. 이게 구속사예요. 결혼도 그래서 ‘언약’이라고 하잖아요. 하나님과 나를 묶는 언약의 관계가 결혼이에요. 그러니까 힘든 배우자도 하나님과 나를 묶는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수고하는 거예요. 창조주 하나님과 나와 하나가 되는데 그 어마어마한 지금 이제 이 관계가 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그까짓 거 이 땅에서 아내, 남편을 용서하지 못할 수가 없는 거예요. 거기 길이 있는 거예요, 길! 성경마다 길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진다면 어디에도 길 the way 예수님이 계시니까 성경을 읽을 때마다 희망이었어요.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었어요. 결혼뿐만 아니라 여러 갈등과 다툼으로 분열된 우리 사회에도 지금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겠다는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이 결단과 희생이 있다면 회복이 가능한 거예요. 요즘 정말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러 모이더라고요. 저는 이제 잠깐만 봐서 예, 엊그제 고등학생들이 시청 앞에 모여서 기도회를 하더라고요.
제가 다음 세대를 위해서 목을 놓아 기도를 한 그 자리에 이 청소년들이 모여서 다른 거 안 하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그러더라고요. 기도도 너무 잘하고 나라를 위해서 기도도 하고. 이 절망 속에서 희망을 보게 되는데요. 여러분 정말 지금 상상도 못한 일이 일어났어요. 이런 때일수록 제가 이제 청소년, 청년들에게 좀 더 말씀을 읽고 들리게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 거예요. 모였으니까! 이 말씀을 좀 읽어 들리게 했으면 좋겠는데. 어떤 말씀일까요? 그러니까 언약책의 말씀은 내가 듣고 마음에 드는 것만 골라가질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복도 내 것이고 책망도 내 것이고 위로도 저주도 다 내 것이에요. 왜죠? 내가 이 언약 안에 있기 때문에요. 그래서 본문이 뭐라 그래요? ‘언약책의 모든 말씀을 읽었다’고 그래요. 듣기 좋은 것만 골라서 읽지 않았어요. 복도 저주도 위로도 책망도 다 읽어 줬어요. 요시야 자신이 듣고 옷을 찢을 수밖에 없던 그 말씀까지 하나도 빼지 않고 다 읽어 줬어요! 근데 우린 성경을 어떻게 읽습니까? 골라 들으려고 해요. 내게 복 주는 구절, 위로되는 구절은 밑줄 긋고 쫙쫙 긋고 외웁니다. 한국 성도들이 가장 좋아하는 구절 1위가 빌립보서 4장 6절이래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또 욥기 8장에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그런데 내 죄를 찌르는 구절, 나를 불편하게 하는 구절. “내가 이곳에 재앙을 내리되 돌이키지 아니하리라” 이런 구절은 어때요? ^^; “이건 그때 이야기지, 이건 나하고 상관이 없지, 이거는 요시야 때 이야기지” 이런다니까요. 그래서 기복적인 구절만 붙들고서 맨날 성경 봤다고 하면 안 되는 거예요. 성경은 구속사의 책이기 때문에 빌립보서 4장 6절도 구속사로 해석하면은요, 기도하고 간구를 하려면, 감사하려면은 이 내 죄가 보여야지. 해석을 그렇게 해야지 되는 거예요. 그러므로 성경을 차례대로 읽어 가는 것이 책망도 위로도 받는 내 죄가 보이는 비결인데요. 이거 정확하게 신약의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위로 얘기가 여기 하나도 없네요. 편식하지 않고 이렇게 네 가지 책망을 받아야 17절에 이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한다”고 이러잖아요. 그러므로 나를 찌르는 말씀은 나를 버리려는 말씀이 아니에요. 언약 밖으로 밀어내려는 말씀도 아니에요. “너는 내 백성이다, 그러니 돌아와라” 이 말씀이에요. 찔림도 언약의 은혜예요. 책망도 나를 포기하지 않으신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그러니까 말씀, 모든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내 죄를 찌르는 그 말씀까지도 “아멘! 예! 이것도 저를 살리시는 언약의 말씀입니다!” 하고 받는 거예요. 바로 이것이 우리 큐티의 정신이에요. 그러니까 말씀을 들은 사람은 자기 말을 들려주지 않아요. 언약책의 모든 말씀을 들려주는 거예요. 그러므로 성경을 차례대로 읽어 가는 것은 나의 죄를 피해갈 수 없는 아주 최고의 훈련이에요. 성경을 여기저기 읽으시면 안 돼요. 그러므로 모으고 성경을 읽고 들려주고 나누는 모임이야말로 최고의 공동체라고 생각을 합니다.
바벨론 그발 강가에서 내가 사로잡혔기 때문에 하늘이 열렸잖아요. 그러니까 사로잡힌 게 무서운 것이 아니고 사로잡혔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는 지름길이 됐잖아요. 그러니까 성경은 나에게 안 좋은 본문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하나도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을 이렇게 차례대로 읽어 가는 훈련은 이거 아무리 강조해도... 최고의 공동체인 거예요. 이런 훈련을 어디서 받을 수가 없는 거예요.
Q. 성경을 골라 듣고 있지 않습니까?
Q. <큐티인>제목만 보고 건너뛴 날은 없습니까? (찔리죠?)
Q. 나를 찌르는데도, “이건 나한테 해당 안 돼" 하며 피하고 있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Q. 이번 주 목장에서 솔직하게 나누겠습니까?
솔직하게 나눈다고 그냥 아무 말이나 다 하시면 안 돼요. 남들에게 상처 주는 솔직함은 안 돼요. 구원 때문에 좀 생각을 해 보시고.
그런데 맨날 저는 성경을 토시 하나 안 빠지고 지금 읽어 가는데. 맨날 내 죄가 안 보이면 “우리들교회 이상해, 왜 위로를 안 해 줘?” 위로를 왜 안 해줘요? 진짜 위로를 받는 거죠. 사로잡혀서 내 죄가 보였는데. 정말 말씀이 이제 안 들리시는 거죠. 아휴... 진짜 이 안 들리시면 어떻게... 우리들교회처럼 들리는 데도 없는데 여기서도 또 안 들리는 사람이 이렇게 있네요. 그럼 또 맨날 안 들리는 걸 저한테 누가 고발해요? 그럼 이제 내가 너무 애통이 되는 거예요. ‘야, 이거 왜 이렇게 안 들리나?’
자, 언약을 세울 때 첫째 공동체를 하나님 앞에 모읍니다. 모았으면은 모든 말씀을 들려 주는 거죠. 그럼 세 번째는
3. 함께 서서 언약을 세웁니다(3절).
함께 서서 언약을 세우는 거예요. 3절입니다.
3. 왕이 단 위에 서서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우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께 순종하고 그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이 언약의 말씀을 이루게 하리라 하매 백성이 다 그 언약을 따르기로 하니라_왕하 23:3
이제 모든 말씀을 읽은 요시야 왕이 무엇을 합니까? 일어섭니다. 오늘 제목이죠. “언약을 세우되” 언약을 세웁니다. ‘세우다’는 원어로 이제 ‘자르다, 가르다’. 옛날에 언약을 맺을 때 짐승을 반으로 딱 자르고 그 사이로 횃불이 딱 지나갔잖아요. 창세기 15장에 보면은. 이건 목숨을 걸고 약속한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이 약속을 어기면 이 짐승처럼 쫙 잘릴 거다, 그만큼 진지한 거예요. 그러니까 요시야가 세우는 건 새로운 언약이 아니에요. 시내산에서 주셨던 그 언약을 다시 붙드는 거예요. 잊고 버렸던 언약 앞에 다시 서는 거! 이게 말씀을 들은 회개가 가야 할 자리인 거예요. 말씀을 붙드는 거. 이게 여호와 앞에서는 거예요. 어떤 언약을 세웁니까?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께 순종하고 그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키겠다고 서약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고 해요? “이 책에 기록된 언약의 말씀을 이루게 하리라” 전심으로 순종하고 계명을 지켜서 기록된 말씀을 이루게 하겠다는 언약을 세우는 거예요. 여기 ‘이루게 하리라’도 이제 원어로 보면 ‘서게 하다, 세우다’. 그러니까 “기록된 그 말씀이 책 안에만 머물지 않고 내 삶 속에 실제로 서게 하겠다, 내 순종 안에서 그 말씀이 좀 이제 유효하게 되게 하겠다.” 그러니까 말씀을 듣는 것이 최우선이지만 그냥 듣는 데서 끝나면 이건 이제 ‘종이 위에 있는 말씀’일 뿐이죠. 그 말씀이 우리 삶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게 필요하죠.
그러니까 성도의 삶은 말씀이 응하는 삶이 되어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큐티를 안 하니까 이 ‘말씀이 안 들린다’ 그러는 거예요.
그 3절 마지막이 뭐예요? “백성이 다 그 언약을 따르기로 하니라” ‘따르기로 하니라’도 이거 직역하면 ‘섰다’예요. “백성이 다 그 언약 안에 섰다!” 3절 처음에 왕이 단 위에 섰잖아요. 왕을 따라서 백성도 함께 섰다는 거예요. 언약을 세우는 일에 다 함께 동참하고 섰다는 거예요. 요시야가 백성이 다 여기에 참여하게 했다. 이게 바로 ‘서게 했다’는 뜻이에요.
이 한 사람이 이렇게 중요해요. 요시야 한 사람이 언약의 말씀 앞에 서서 백성을 서게 하니까 온 공동체가 함께 ‘언약 공동체’로 빚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함께 모인 공동체가 함께 듣더니 이제 함께 서는 거예요.
여러분, 왜 백성이 다 같이 섰을까요? 말씀을 이루는 거, 말씀을 내 삶에 서게 하려면 그냥 나 혼자만 서도 되는 거 아니에요? 아 말씀 묵상하고 적용하는 큐티도 나 혼자 하면 되지 않아요? 그런데 왜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함께 서야 할까요?
여러분 이거는요 혼자 할 수 없어요. 혼자 서려면 자꾸 넘어질 뿐이에요. 혼자 공부 잘하고, 일 잘하고, 관계 잘할 수 있겠죠. 근데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을 이루는 것은 우리 혼자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오죽하면 우리 예수님도 이 땅에서 말씀이 응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서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아버지 하나님이 성령 하나님이- 다 힘을 다해서 도우셨잖아요. 하나님부터가 늘 함께 일하시는 분이에요.
그래서 우리에게 공동체가 있어요. 목장이 있어요. 혼자 못 서니까 함께 서라고 주신 거예요. 그러니까 목장에서 지체들이 같이 말씀을 붙들고 서 있으니까. “내 주여 내 맘 붙드사” 붙드사! 이거 다 붙들려면은요. 말씀을 붙들고 서 있으니까 그 힘에 기대어 나도 한 발 순종할 수 있는 거예요. 도저히 못 버틸 것 같은 자리도 옆에서 같이 서 주니까 삼각대가 돼 가지고 서게 되는 거예요. 내가 그렇게 한 발 순종하고 적용하면 그게 또 다른 지체에게 함께 서는 공동체가 되어서 그게 이제 서게 해 주는 거예요. 성령님의 손이 되고 발이 되는 거예요. 이 공동체가 뭐예요? 그리스도의 몸이에요. 여러분 요시야가 그렇게 마음과 뜻을 다해 순종해서 그 말씀을 이루겠다고 했지만은 사람은 그 말씀을 이룰 수가 없어요. 서로 함께 서서 붙들어 줘도 우리는 결국 다 같이 넘어질 수밖에 없는 연약한 몸이에요. 그런데 이 연약한 몸을 주님이 자기 몸으로 삼아주셨어요. 주님의 능력으로 덮어주셨어요. 우리가 설 수 없고 세울 수 없는 것을 우리 주님께서 친히 서주셨고, 세워주셨어요.
다윗을 보세요. 너무 연약하고 약한 모습을 우리에게 그대로 다 보여 주고 있어요. “이렇게 내가 연약하니까... 내가 너희들이 이 길을 가지 말라고 ... 내가 날 모두 다 오픈한다.” 그래서 예수님의 조상이 됐잖아요. 지나고 보면요, 사울에게는 공동체가 없어요. 사울은 예배 중독자예요. 사무엘도 불러서 예배드리고, 신접한 자하고도 예배드리고, 자기가 혼자 예배를 드리고. 그렇게 예배 중독자고 사울은 여자 문제도 없어요. 첩도 없어요. 아휴 완벽해요. 맨날 블레셋하고 전쟁만 해요. 전도도 많이 해요. 근데 공동체가 없어요. 옆에 있는데 알아보지를 못해요. 세계적인 선지자 사무엘이 있어요. 세계적인 아들 요나단이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인 다윗이 사위인데 그들을 그냥 미워하고 핍박하고 그러느라고. 왜요? 지옥 뿌리에서 올라온 교만이 있어요. 이 사람 너무 예배 중독자고 그냥 이러는데 자기가 하나님 자리에 있으니까 이제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는 이것 때문에 이 사람이 돌아버렸어요. 그러니까 그 대단한 사람이 옆에 있는데 지체로 여기질 않아요. 똑같은 사람인 사무엘과 요나단이 다윗에게는 최고의 지체가 되었잖아요. 그러니까 공동체라고 다 같은 공동체가 아니고요. 이제 훌다, 힐기야 공동체가 돼야 하는데 우리의 가정도 ‘언약 공동체’이죠. 그러려면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것을 꼭 지켜야 하는..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같이 나눌 때 하나님이 세워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언약은 새 언약이에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과 자기 피로 세우신 언약인데 우리가 말씀 앞에 서고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우는 거 언약의 말씀을 이루게 하는 것은요, 우리 힘으로 이 사울처럼 뭔가를 하고 행위적으로 예배 잘 드리고 뭐 그냥... 맨날 나가서 전도하고 이 행위적인 게 아니에요. 우리가 서는 것은요. 오직 그리스도의 몸에 딱 붙어 있는 거예요. 공동체에 속해서 함께 있는 것이 바로 우리가 언약을 세울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이에요. 그냥 공동체에서 나누기만 해도 기쁘게 받으세요. 여러분이 이제 목장을 우습게 여기시면 안 돼요. 이게 대단한 일인데.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적용할 수 있는 일은 이 공동체에 딱 붙어 있는 거예요. 예배 자리에 나오는 거예요. 목장에 들어가 목장 식구들과 함께 묵상하고 진실하게 나누고 잘 듣고 전심으로 순종하면 하나님이 딱 모아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가 목장에서 거룩한 얘기하라는 거 아니에요.
이번 예배 때 남편이 나에게 보이면서 “남편이 머리입니다.” 계속 남편이 아내에게 “남편이 머리입니다.” 계속 얘기를 하니까 아내가 “네 맞아요. 내 남편은 머리카락입니다.” 그러고 대답을 했대요. ^^ 이렇게 나눠도 기쁜 거예요. 그죠? 이런 얘기를 어디 가서 할 수 있겠어요? 그것이 연약한 내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거예요. 그렇게 할 때 부족한 내 삶에 하나님의 언약이 굳게 세워지는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요, 성경이 너무 전 세계 곳곳에 보급되고 있어요. 그러므로 말씀대로 살았다는 간증의 시대를 살아야 하는 게 이 시대의 사명이에요. 간증이 없어요. 보통 간증하지 말라고 그래요, 어떤 데서는. 그런데 이단들이 또 너무 이상하니까 그 말씀이 너무 이제 중요한 거죠.
SG 시니어 여러분들이 경북에 TT를 세 곳을 다녀오셨는데 너무 어려운 데를 가셔서 담임 목사님들이 막 그냥 TT팀의 방문이 여름날에 단비와 같이 힘든 사역의 위로가 되었다고 하시는데요. 뭘로? 간증과 목장 시연을 통해서 막 너무 놀라고 은혜를 받는 시간이 되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SG 성도님들이 얼마나 그곳 담임 목사님에게 열성적으로 8월에 대구 목세를 홍보하시는지 결국 담임 목사님의 약속을 받아내셨다는 거 아니에요. 이 TT 사역이 지역 교회뿐만 아니라 우리들교회에도 이 선교와 전도에 진짜 꼭 필요한 사역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됩니다. 앞으로 우리들의 간증은 가고 오는 세대에서 언약을 세우는 찬란히 빛나는 교과서가 되리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지금 문서로 남기고 있잖아요. 이건 앞으로 어떻게 쓰여질지 몰라요. 후세에서. ‘이때 지금 이런 간증이 있었다’ 말씀을 멸시하면은요, 그래서 이제 포로로 가서 성경 열심히 읽잖아요, 이스라엘 백성이. 근데 이제 성경이 다 퍼졌으니까 이제는 ‘말씀대로 살았다’는 간증이 간증이 교과서가 되는 날이 오게 돼서 이게 경전이 될 줄 믿어요!
Q. 나는 공동체 안에서 어떤 모습으로 있습니까? 누워 있습니까, 앉아 있습니까, 서 있습니까? 아니면 부재중입니까?
Q. 공동체 안에서 나도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다는 사실을 경험한 일이 있습니까?
Q. 내가 함께 서 있어 줘야 할 지체는 누구입니까?
Q. 우리들의 간증이 언약 교과서가 될 것을 믿습니까?
*목장 기도제목
A: 1)둥이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인생을 힘차게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힘차게 하루를 살도록(약 받아오기)
2)동생의 일들이 수면 위로 들어 난 것이 살려 달라고 하는 것임을 알고 구원 위해 기도 하도록 3)부모님의 영육의 강건함도 내가 힘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요동치는 내 마음을 지키도록(부모님께 키워주셔서 감사하다 전하도록) B: 주어진 경계 가운데 매일 하루만 살도록
C: 키워주시고 곁에 계시고 예수 믿게 해준 부모가 최고의 부모이고, 불쌍히 보이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라 볼 수 있도록D: 때가 찰 때 까지 준비하고 기다릴 수 있도록E: 힘들었던 마음 살펴보고 괜찮다 잘했다 위로하도록F: 무엇을 위해 기도 하길 원하시는 잠잠하게 묻고 기도 하도록
한 주간 큐티로 살아내는 목장되기를 소원하며, #함께 #서서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