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7.12.(주일) 사무엘하 20:18-22 「충성된 자」 이성훈F 목사님(2부)
모임 장소 : 카페 로쥬
모임 인원 : 김화용 목자님 외 4명
18. 여인이 말하여 이르되 옛 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아벨에게 가서 물을 것이라 하고 그 일을 끝내었나이다
19. 나는 이스라엘의 화평하고 충성된 자 중 하나이거늘 당신이 이스라엘 가운데 어머니 같은 성을 멸하고자 하시는도다 어찌하여 당신이 여호와의 기업을 삼키고자 하시나이까 하니
20. 요압이 대답하여 이르되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다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다 삼키거나 멸하거나 하려 함이 아니니
21. 그 일이 그러한 것이 아니니라 에브라임 산지 사람 비그리의 아들 그의 이름을 세바라 하는 자가 손을 들어 왕 다윗을 대적하였나니 너희가 그만 내주면 내가 이 성벽에서 떠나가리라 하니라 여인이 요압에게 이르되 그의 머리를 성벽에서 당신에게 내어던지리이다 하고
22. 이에 여인이 그의 지혜를 가지고 모든 백성에게 나아가매 그들이 비그리의 아들 세바의 머리를 베어 요압에게 던진지라 이에 요압이 나팔을 불매 무리가 흩어져 성읍에서 물러나 각기 장막으로 돌아가고 요압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왕에게 나아가니라
충성된 자 진짜 충성된 자는, 첫 번째
1. 여호와의 기업을 아낍니다(18-19절)
18. 여인이 말하여 이르되 옛 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아벨에게 가서 물을 것이라 하고 그 일을 끝내었나이다
19. 나는 이스라엘의 화평하고 충성된 자 중 하나이거늘 당신이 이스라엘 가운데 어머니 같은 성을 멸하고자 하시는도다 어찌하여 당신이 여호와의 기업을 삼키고자 하시나이까 하니_삼하 20:18-19
여러분, 머릿속에 그림을 한번 그려보세요. 이스라엘 최북단 요새 아벨 성입니다. 아벨 성 바깥에 지금 토성이 높이 높이 쌓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토성 위에 군사들이 곡괭이를 들고서 성벽을 지금 막 깨부수고 있는 거예요. ‘쾅쾅쾅’ 하더니 성벽, 그 단단한 성벽에 금이 쫙 갑니다.
성안은 이제 아수라장이 됐어요. ‘이제 다 끝났구나. 우리 어떡하나?’ 모두가 벌벌 떨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그 성벽 위로 누군가가 올라와요. 근육질 장군일까요? 아니에요. 높으신 나으리가 올라왔을까요? 아닙니다. 전쟁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여인 한 명이 지금 올라오는 거예요. 그것도 이름도 기록되지 않는 이 무명의 여인이 그 무너지기 직전의 성벽 위에 지금 올라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런 여인을 지금 쓰셔서 충성의 모델로 우리한테 지금 딱 보여주고 계신 거예요. 충성은 힘이나 감투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충성은 ‘내가 무엇에 지금 목숨을 걸고 있는가’, ‘무엇에 내 마음을 바치고 있느냐’ 이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다 뭔가에 목숨을 걸고 살죠. 우리가 의식하든 하지 않든,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가 사는 삶 자체가 뭔가 우리의 목을 내놓고 사는 거예요. 목숨을 걸고 사는 겁니다. 돈에, 건강에, 가정에, 성공에, 칭찬에, 명예에, 권력에… 그 무엇이 됐든 우리는 다 뭔가 우리가 목숨을 바쳐서 목숨을 걸고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있는 거예요. 이런 것들은 따라서 우리의 충성을 늘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우리의 충성이 하나님보다 그것들에 더 많이 가는 순간 그것들은 ‘우상’으로 변신하게 되는 거예요. 여인이 이 위태로운 성벽 위에서 꺼내 든 것은 칼도 아니고 창도 아니고 방패도 아었습니다. 이 여인이 꺼내 든 건 ‘말’이었어요. 말. 그래서 여인이 이렇게 말하죠. “옛말에, 옛날 말에, 옛날부터 이 아벨에 가서 물어보라 하지 않았습니까? 이곳에 와서 물어보면 해답을 얻었다고요. 그런데 지금 당신은 왜 이곳까지, 이 먼 이곳까 지 와서, 그렇게 지혜 있는 도시에 와서 왜 물어보지 않고 성벽부터 지금 부수고 계신 것입니까?”
이 여인이 세상에서 가장 힘센 사람 중 하나인 요압 장군에게 이렇게 질문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여인의 질문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닙니다.
신명기 20장에도 뭐라 그랬냐면, ‘성을 공격하기 전에는 그 성에게 그 성과 화평을 청라 선언해라’(신 20:10). 먼저 성을 공격하기 전에 이야기를 하라는 것이죠. “싸움을 피할 수 있으면 피하라고 이 모세오경 신명기에 적혀 있는데, 말씀에 적혀 있는데 왜 당신은 이스라엘의 장수라는 자가 그렇게 하지 않고 지금 무턱대고 성벽부터 부수고 있느냐?” 여인̇ ̇은 지금 말씀을 기억하고 말씀으로 묻고 또 그 장군에게 지금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잘 보세요. 세바̇ ̇는 문제가 생겼을 때 나팔부터 불었죠. 그렇죠. 반역의 나팔부터 불었어요. “내가 어떻게 다윗 저 사람과 같은 사람을 왕으로 섬기면서 살겠는가! 이건 정의가 아니다! 이스라엘이여, 나를 따라서 다윗으로부터 독립하자!” 반역의 나팔을 분 거예요. 정의의 나팔을 분 것입니다. 장군 요압̇ ̇ ̇ ̇은 이 아벨을 무너뜨리고 이 반역자를 잡기 위해서 토성부터 쌓았어요.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것부터 했습니다. 그러나 여인̇ ̇은 어떻게 했습니까? 먼저 말씀을 생각하고 물었어요. 묻는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은 이 여인을 뭐라고 계속해서 말합니까? “지혜로운 여인”이라고 그러잖아요. 지혜는 ‘묻는 마음’이고, 또 ‘듣는 마음’인 것입니다. 여인은 자기를 ‘화평하고 충성된 자 중 하나’라고 소개합니다. 화평과 충성, 이 각각에 대해서 책을 몇 권씩 쓸 수 있는 아주 무거운 개념들이에요. 그러나 사실 이 둘은 한 몸입니다. 여러분, 화평이 뭔가요? 싸움이 없는 것? 문제가 없는 것? 물론 그것도 화평의 현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화평, 이 ‘샬롬’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들이 다 제자리를 잘 지키고 있는 그 완전한 질서 상태, 그것을 이제 화평이라고 그러는 거예요. 그러면 충성은 뭘까요? 그 각자의 것들이 다 자기 자리를 잘 지키고 있는 것, 내가 하나님께서 맡기신 나의 자리를 잘 지키고 있는 것, 그것이 충성인 거예요. 무겁고 그 자리가 부담스럽고 서 있기 힘들면 우리는 떠나고 싶죠. 앉아 있는 나의 자리가 가시방석같이 나를 찌르고 힘들게 하는 곳이면 버리고 떠나고 싶어요.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고 버티면서 그 무게를 감당하면서 그 자리에 있는 것이 바로 충성입니다. 요즘 월드컵인데 축구도 11명이 하잖아요. 그런데 그 11명의 선수가 모두 다 손흥민처럼 스트라이커가 되기를 원하고 이름이 나길 바라는 마음에 다 나가서 골대 앞 에서 골을 넣으려고 하면 그 팀은 망하는 것입니다. 그 팀이 살기 위해서는 그 11명이 구석진 자리여도, 이름이 드러나지 않는 자리여도 각자 맡겨진 자기 자리를 잘 지킬 때, 그 팀이 살아나는 거예요. 이게 바로 ‘화평’입니다. 그리고 내가 내 자리를 잘 지키는 것이 ‘충성’이에요. 그러니까 한 사람의 충성̇이 모여서 화평̇̇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이렇게 불평하잖아요. “우리 가정은 왜 이런지 모르겠어요.” “우리 회사는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우리 동네는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우리 교회는 왜 이렇게 문제가 많은지 모르겠어요. 왜 화평이 없는 거야?“ 그런데 그 불평은 순서가 완전히 잘못된 거예요. 화평은 내가 내 자리를 잘 지킬 때, 내가 내 자리에 ‘충성’할 때 그것들이 모여서 ‘화평’이 이루어지는 것임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이 눈으로 세 명을 다시 한 번 보세요. ① 세바. 자기 자리를 어떻게 했습니까? 박차고 나갔어요. 정의라는 이름으로 옳고 그름을 따지면서 ”다윗 같은 사람하고는 내가 나눌 분깃이 없다. 상종하기 싫다. 어떻게 저런 사람이 나의 왕이냐!“ 하면서 박차고 떠났습니다. ② 요압은 어때요? 요압은 다윗의 부하임에도 불구하고 출중한 자기의 능력을 힘입어서 어떻게 했습니까? 다윗의 머리 꼭대기로, 자꾸 지금 자기 자리를 넘어서는 거예요. 위로 위로 올라가는 겁니다. ③ 그러나 이 여인은 어떻게 했습니까? 여인은 아무도 올라가기 싫어하는 그 무너지는 성벽, 그 자리에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신다는 걸 알고서 거기에 올라갔어요. 그리고 그 자리에 섰습니다. 왜 이 두 사람에 비해서 제일 연약한, 아무런 힘도 없는, 영향력도 없는 이 무명의 여인만이 자기의 자리를 지켰을까요? 그것은 힘이 없었기 때문이고, 권세가 없었기 때문이고, 무명이었기 때문이겠죠.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여인이 성을 보는 눈이 달랐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아벨 성을 보는 눈이 달랐다는 거예요. 이 ‘아벨’의 뜻이 ‘초원’이라는 뜻이거든요. 초원, 아벨은 초원이에요. 근데 요새 이제 우리 TT 가시잖아요? 초원별로 다 가시는데 여러분 공동체를 한번 생각하면서 이 말씀을 같이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이 아벨 성을 보는 눈이 달랐어요. ⓐ 세바에게 성은 무엇이었습니까? 이 아벨 성은 자기 목숨을 숨길 ‘방패̇ ̇ ’ 같은 거였어요. 그러니까 방패로 생각했단 말이에요. ⓑ 그러면 이 요압 장군은 이 성을 뭘로 봤습니까? 자기의 ‘트로피’가 될 걸로 봤겠죠? 전적(戰績)으로 봤어요. 자기가 차지할 먹잇감, 자기가 맞춰야 할 ‘과녁̇ ̇ ’, 이런 걸로 보는 거예요. 사냥감으로 봤습니다. ⓒ 그러나 이 여인에게는 이 성이 무엇이었느냐? 여인이 말합니다. “어머니 같은̇성̇이다. 사람들을 품고 먹이고 길러 준 어머니와 같은 성이다”라고 지금 이 아벨 성을 보는 것이고요. 또 하나가 있죠. “주인이 사람이 아니라, 여호와이신 ‘여호와̇ ̇ ̇의 기업̇ ̇ ̇ ’이다” 이렇게 지금 여인은 이 성을 보고 있습니다. 똑같은 성인데 이 세 사람이 각자 다 다른 것을 보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무엇이 보이느냐”가 바로 그 사람의 충성을 드러내는 거예요. 내가 내 가정을 볼 때 무엇을 보고, 우리 초원을 대할 때 내가 무엇을 보느냐가 우리 교회를 볼 때 내가 무엇을 떠올리느냐가 나의 충성을 지금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건 단지 3천 년 전 이야기가 아니에요. 오늘 여기에 있는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교회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아벨 성과 같은 이 교회가 무엇이에요? 교회는 주님께서 자기 피로 사신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그리고 성경 갈라디아서 4장 26절에 뭐라고 그럽니까? “우리 어머니”라고 부르는 공동체가 이 영원한 교회인 거예요. 교회가 우리를 복음으로 낳고 말씀으로 양육해 갑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교회를 어떻게 대하나요? 마음에 조금 서운한 거 생기면 등 돌리고, 불평하고. 내가 옳다고 여기면서 그렇게 교회의 가슴에 못을 박고 있는 일은 없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아무리 지금 내 판단이 옳다고 해도 이렇게 하는 것은 어머니 같은 성, 어머니 같은 하나님의 기업인 교회를 향한 충성은 아닌 거예요. 그러니 이 어머니 같은 공동체를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삼키는 것이 아니라 아껴야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아끼시는 분 아껴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 요나 선지자가 왜 그렇게 니느웨로 가기 싫어했어요? 요나 선지자가 회개를 선포하고서 왜 어떻게 하나 두고 보면서 팔짱을 끼고 기다렸습니까? 니느웨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이 용납이 안 되는 거예요. 왜요? 앗수르는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제국 중에 제일 잔인하게 억압했던 제일 흉악한 아주 악질 제국 중의 제국이었거든요. 그러니까 요나가 너무 이해가 되는 겁니다. “어떻게 저런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가 있어!” 이렇게 옳고 그름으로 따지면 맞아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니느웨에 대해서 뭐라고 그러셨습니까?“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욘 4:11). 여러분, 니느웨 같은 성도 이렇게 아끼시는데 자기 피로 사신 저와 여러분은 얼마나 더 아끼시겠어요? ★하나님은 ‘아끼시는 하나님̇ ̇̇ ’이십니다. 우리 자신은 우리 삶을 아끼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자주 아끼지 않아요.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이런 삶을 살아서 뭐 해?” 원망하고 불평할 때가 너무 많아요.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들의 삶을 이 세상 무엇보다도 아끼고 또 아끼십니다. 이 아끼심을 받았기 때문에 오늘 아침 우리가 이 자리에 나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이 아끼심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도 그 아끼심으로 다른 사람들을 그리고 우리의 어머니 같은 이 교회를 아낄 수 있는 것입니다.
▪ 적용질문
Q. 가정과 교회를 볼 때 뭐가 먼저 보입니까? 내 방패입니까, 과녁입니까, 여호와의 기업입니까?
Q. 이번 주 내가 아껴야 할 여호와의 기업 하나는 무엇입니까? 어떻게 아끼겠습니까?
충성된 자는 첫 번째 여호와의 기업을 아끼고요. 두 번째는
2. 내 충성을 장담하지 않습니다
20. 요압이 대답하여 이르되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다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다 삼키거나 멸하거나 하려 함이 아니니
21. 그 일이 그러한 것이 아니니라 …… _삼하 20:20-21a
여인의 질문에 요압이 지금 답을 하는데요. 아주 장담을 하죠. “결단코 그렇지 않다. 결단코 그렇지 않다.” 그것도 모자라서 “그 일이 그러한 것이 아니다” 막 두 번 세 번 강조를 합니다. 한 번 말해도 될 일을 이렇게 두 번 세 번 강조해서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일단 수상한 사람인 거예요. 뭔가 있는 거예요. 게다가 이 표현은 이 ‘결단코’라는 이 표현은 ‘내가 거짓말이면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도 내가 받겠다’라는 아주 가장 강한 그 맹세의 표현입니다. 비교해 보세요. 여인은 “나는 화평하고 충성된 자 중 하나입니다”라고 고백했어요. 사실 여인 입장에서는 이거 자체가 하기가 쉬운 고백이 아니에요. 왜요? ‘충성’하고 상관이 없는 처지잖아요. 그러나 “화평하고 충성된 자 중 하나다” 이렇게 고백을 하는데, 이 요압은 다 갖추고도 어떻게 합니까? “결단코 아니야! 결단코 아니야! 나 안 그래! 그럴 리가 없어!” 부인하는 거예요. 참 충성은 이렇게 ‘고백’을 하는 것이고요. 병든 충성은 이렇게 ‘변명’하고 ‘부인’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무서운 게 있습니다. 요압은요, 아마도 진짜 이렇게 생각했을 거라는 거예요. 거짓말을 하려고 그런 게 아닐 거라는 겁니다. 무슨 말입니까? 요압은 지금 자기가 하는 게 너무도 옳은 일이에요. 왜요? 이 나라 위한 일이잖아요. 다윗 왕을 위한 일이잖아요. 다윗 함께 충성하는 일이거든요. 그래서 지금 이 북쪽 끝까지 올라와서 이 반역자를 지금 찾아내고 있는 일이거든요. 지금 자기가 하는 일이 너무 옳은 일입니다. 충성스러운 일인 거예요. 나쁜 줄 알고서 나쁜 일을 속여가면서 하는 사람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 바로 이렇게 자기가 옳다고 믿으면서 다른 사람 삼키는 사람이 더 무서운 사람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진심으로 그런다고 내가 진심으로 그런다고 그게 진실이 되는 건 아니에요. 실상은 반드시 시간이 지나면 드러납니다. 끝까지 우리가 감출 수가 없어요. 요압은 입̇으로는 “삼키거나 멸하거나 하려 함이 아니다”라고 말을 하지만 손̇으로는 어떻게 하고 있어요? 지금 성벽을 지금 무너뜨리고 있는 거예요. 이 요압은 세바를 쫓아오던 중에 불과 얼마 전에 오는 길에 사촌 아마사를 만났습니다. 만나서 “샬롬! 평안하냐? 잘 지내냐?” 입으로는 그렇게 인사를 했지만 어떻게 했습니까? 다른 손으로는 칼로 그 사촌의 배를 찌른 거예요. 입에는 ‘샬롬’이지만 손에는 ‘칼’이에요. 성경이 이 두 장면을 나란히 붙여 놓은 건, 우리 안에 있는 이 요압 같은 모습을 보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입의 고백 말고 이 손이 남긴 자국을 봐야 되는 거예요. ★말을 보지 말고 행동을 봐야 되는 겁니다. 입으로는 “사랑해서 그랬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상대의 마음에 지금 피멍이 들어가는 일이 얼마나 많아요. 입으로는 “이게 다 너를 위해서야”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상대가 숨을 못 쉬는 일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입으로는 “야 이거 옳은 말 한 건데 왜 그래? 맞는 말이잖아! 말은 맞잖아?”라 고 하지만 실제로는 화평이 그것 때문에 다 깨지는 일들이 우리 살아가면서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때 우리는 물어야 되는 거예요. 내 충성은 지금 누구를 살리고 있는가? 아니면 죽이고 있는가? 삼키고 있는가?요압은 이어서 세바를 고발을 하는데요.
21. …… 에브라임 산지 사람 비그리의 아들 그의 이름을 세바라 하는 자가 손을 들어 왕 다윗을 대적하였나니 너희가 그만 내주면 내가 이 성벽에서 떠나가리라 하니라 ……_삼하 20:21b
세바의 출신, 아버지, 이름, 죄목 이것을 완벽히 정리해서 하나의 그 기소장으로 딱 내놓는 것 같아요. 그런데 자기가 불과 얼마 전에 사람을 속이고, 그것도 자기 사촌을 속이고 죽인 일은 입도 뻥긋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다윗도 그랬잖아요. 나단 선지자가 우리아를 죽인 자신의 죄를 지금 이제 고발하기 위해서 비유로 들잖아요. 부자와 가난한 자를 비유로 들어서 얘기할 때 그 얘기 듣자마자 다윗이 뭐라고 그럽니까? “그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다!”자기인 줄도 모르고. 남의 죄를 볼 때 우리가 다 명탐정이 되죠. 남의 죄를 판단할 때 전부 다 다 명판관이 돼요. 그러나 내 자신을 볼 때 그 시력이 제로가 됩니다.★남의 죄에 정확해지는 것, 그것이 충성의 증거는 아니에요. 그것은 병든 충성의 증상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제 요압은 조건을 걸죠. “세바 그 자만 나한테 내주면 나는 떠나겠다. 이 성을 공격하지 않고 떠나겠다” 이렇게 조건을 내겁니다. 요구한 건 ‘남(세바)의 목숨’이에요. 근데 주겠다는 건 뭐예요? “떠나겠다” 사실 아무것도 주는 거 없어요. 목숨을 요구하지만 자기가 내놓는 건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이것도 무너진 충성의 한 증상인 거예요.그런데 여러분 이 요압도, 세바도 충성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세바는 얼마나 그 정의감이 투철한 사람이에요? 다윗에 대해서 지금 정죄하고 있는 것이잖아요. 요압은 또 얼마나 능력이 또 출중한 사람입니까? 누구보다도 다윗의 가려운 곳을 다 지금 긁어주는 것 같잖아요. 그러니까 본인들은 사실 충성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상상조차 안 했을 겁니다. 근데 문제는 뭐예요? 이들이 지금 엉뚱한 데 그 충성을 쏟아붓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죠. 우리도 돈에, 성과에, 또 칭찬에, 자식에게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우리 자신에게, 우리의 충성을 쏟아부으면서 살아갈 때가 너무도 많아요. 거기에 우리 목숨을 걸고 사는 겁니다. 문제는 그 충성이 지금 무엇인가를 삼키고 있다는 거예요. 그런 충성은 반드시 무엇인가를 삼키고 있다는 겁니다. 돈에 충성하면 그 충성이 가정과 나의 건강을 삼킵니다. 자녀 성적에 충성하면 그 충성이 자녀의 숨을 삼켜 버리는 거예요. 내 편 만드는 데 충성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마저 삼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진짜 질문은요, “내가 지금 충성하고 있는가? 아닌가?” 이것이 아니라 “내 충성이 지금 무엇을 삼키고 있는가? 내 충성 때문에 아파하는 사람이 누구고, 무너져 가고 있는 공동체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것이, 이것이 이제 우리 큐티 하는 우리가 돌아봐야 될 거예요. “나는 절대 안 그래!” 이게 바로 요압의 장담 아니겠어요? 근데 여러분, 장담하면 우리가 또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죠? 누구죠? 베드로잖아요. 베드로가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이 “결코”가 요압이 말했던 그 “결단코”와 똑같은 단어에 하나는 히브리어, 하나는 헬라어이긴 하지만 똑같은 단어예요. 뭐냐 하면 지금 베드로도 목숨을 지금 걸고서 -하나님께 지금 목숨을 걸고서- 맹세를 하는 겁니다. 그만큼 세게 장담하는 거예요. 그런데 바로 그날 밤 베드로가 어떻게 했는지 우리 너무 잘 알죠. 불과 몇 시간 안 지나서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내 충성을 장담하는 사람은 이처럼 내가 제일 자신하던 그곳에서 무너지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충성이 주님을 기대해서 한 충성이 아니라 나 자신을 기대한 충성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실 이 요압도, 또 베드로도 이렇게 장담하는데요. 이게 남 얘기가 아니라 바로 제 얘기더라고요. 저는 어려서부터 이 ‘충성’이라는 글자 이 두 글자를 보면 가슴이 웅장해졌습니다. 한 자 ‘충(忠)’자만 보면 제 가슴이 막 뛰었어요. ‘내가 하나님께 충성한다’ 이런 생각만 하면 막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엔돌핀이 막 나오곤 했습니다. 이게 언제냐? 초등학교, 중학교 때!! 벌써 이게 정상이 아니죠. 그죠? 이상하죠? 그러니까 이제 지금 생각해 보면 저희 아버지 의사시니까 남을 진단하고 고칠 게 아니라 이 아들이 병들었다는 걸 좀 보셨어야 되는데 전혀 생각을 못 했다는 거예요. 전혀 생각을 못 했어요. 이게 잘못이라는 거, 이상하다는 걸 전혀 몰랐습니다. 그 당시에 이제 삼국지가 유행이었어요, 제 어렸을 때는. 요새는 뭐 그런 거 없지만. 삼국지에 얼마나 재미있는 그 전투 씬과 이런 것들이 많이 나와요? 근데 저는 그 삼국지를 읽으면서도 제일 제가 좋아하던 곳은 다른 곳이 아니라 충성을 맹세하는 그 도원결의 장면, 그리고 다 망해가던 나라에 내 충성을 바쳐서 마지막 전투에 나가겠다 하면서 제갈공명이 쓴 그 출사표 장면. 그 두 장면을 보면 전 그렇게 가슴이 뭉클해지는 거예요. 그러면서 저는 생각하는 겁니다. ‘야! 나도 이러한 충성으로 하나님을 섬겨야지!’ 그러니까 여러분 제가 어떤 장담이 있었겠어요? ‘나처럼 하나님 앞에 잘 준비된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내가 하나님께 평생 죽을 때까지 죽도록 충성할 거야!!’ 막 이런 장담을 하면서. 정말 이상했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하면. 정말 이상한 것이죠. 그런데 여러분 바로, 이 확신이 제가 바리새인이고 서기관이라는 것을 전혀 보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제 주변 사람들은 다 알지 않았겠어요. 여러분? 말만 들어도 아시겠죠? 이런 애가 이러고 살아요. 학교에서 이러고 살아요. 그러면 얘가 정상이에요? “쟤 이상한 애” 다 알 텐데 저는 그게 이상한 줄 몰랐다는 거예요. 왜요? 장담이 너무 강하니까. 제 확신이 너무 세니까. 남의 신앙은 다 평가하면서 제가 이상하다는 거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 삶의 결론으로 어떤 사건이 왔느냐? 아내에게 이제 이혼당할 뻔!한! (우리들교회 안 만났으면 이혼당한 거죠.) 이혼당할 뻔한 제 인생의 결론을 이제 맞이하게 된 거예요. 저를 힘들게 한 거는 그러니까 아내가 아니었던 것이죠. 장담맨!!할 줄 아는 건 장담밖에 없는 이 장담맨이었던 제가 제 인생에 가장 큰 문제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충성을 장담하던 사람이 같이 사는 아내에게 그 충성으로 품어주지 못했던 것이고요. 아직 있지도 않은 거창한 목회지를 생각하고 신학교를 생각하고 선교지를 생각하면서 ‘내가 저기서 충성하리라!!’ 막 헛된 망상을 꾸면서 정작 하나님께서 저에게 세워 두신 이 남편의 자리에 충성하지 못했던 것이죠.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여러분, 내 충성을 장담하는 순간 회개는 가장 멀어지고 맙니다. 왜 그렇습니까? 장담은 “하나님, 절 좀 불쌍히 여겨 주세요. 제가 안 되는 게 이렇게 많아요. 저를 좀 불쌍히 여겨 주세요.” 이렇게 하는 게 아니라 장담은 뭐예요? “하나님, 저 괜찮아요. 저 아무 문제 없어요. 바쁘신데 저까지 신경 쓰실 거 없어요. 다른 사람 돌보세요. 저는 제가 알아서 잘 충성할게요” 이게 장담이기 때문에 그래요. 회개를 할 수가 없는 겁니다. 따라서 여러분, ★진짜 충성된 자는 내 충성을 장담하지 않습니다. 대신 기도해요. 기도하는 거예요.“주님 제 안에도 이 요압이 있습니다. 제가 충성하고 싶어도 충성하지 못하는 게 저 자신입니다. 그러니 저를 좀 용서해 주세요. 저를 도와주세요. 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이렇게 기도하면서 충성된 자로 빚어져 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 적용질문
Q. 최근 "난 절대 안 그래" 장담했던 일은 무엇입니까?
Q. 누구의 잘못을 낱낱이 지적하고 있습니까? 이번 주에 "그게 아니라요" 대신 "그러게요."로 시작해야 할 대화가 있다면, 누구와 어떤 대화입니까?
충성된 자, 진짜 충성된 자는 첫 번째로 여호와의 기업을 아끼고요.
두 번째는 내 충성을 장담하지 않고요. 세 번째는
3. 내 안의 세바를 내어던집니다(21c-22절)
21. …… 여인이 요압에게 이르되 그의 머리를 성벽에서 당신에게 내어던지리이다 하고
22. 이에 여인이 그의 지혜를 가지고 모든 백성에게 나아가매 그들이 비그리의 아들 세바의 머리를 베어 요압에게 던진지라 이에 요압이 나팔을 불매 무리가 흩어져 성읍에서 물러나 각기 장막으로 돌아가고 요압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왕에게 나아가니라_삼하 20:21c-22
요압의 요구에 여인이 지금 이제 다 대답하는 것이죠. “그의 머리를 성벽 너머로 내어 던지겠습니다. 당신에게!!” 대답을 하는 거예요. 요압은 결백을 지금 장담했었는데 이 여인은 실행을 결단합니다. 약속합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켜서 실행하는데요. 그런데 여인 혼자 칼을 들고 처리하는 게 아니죠. 여인은 모든 백성을 지혜로 설득했고 그 공동체가, 그 백성이 함께 이 반역자 세바를 처리했습니다. 죄가 공동체 안에서 공동체의 손으로 다뤄진 거예요. 여기서 놓치면 안 되는 게 있습니다. 여인이 성을 아꼈잖아요. 그렇죠? ‘여호와의 기업’으로 아꼈잖아요. 그렇다고 그래서 그 성에 지금 숨어 들어온 세바를 감쌌나요? 그렇지 않아요. 아꼈기 때문에 성을 아꼈기 때문에 반역자 세바를 도려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다윗을 보세요. 다윗이 압살롬을 얼마나 아꼈습니까? 편애했잖아요. 많은 자식들 중에 제일 아꼈잖아요. 그런데 그 아낀 결과가 뭐였어요? 반란으로 끝났단 말이에요. 너무 아꼈는데 압살롬의 죄를 다루지 않았잖아요. 진짜 아낀 게 아닌 거예요. 죄를 감싸는 건 사랑이 아닙니다. 진짜로 아끼는 사람은 그 죄를 도려내는 거예요. 여러분 바로 이것이 ‘내어던지는’ 거예요. 성벽 안에 숨어든 그 죄악의 세바를 끌어안고 있으면 성과 함께 나도 무너지는 거예요. 그러나 부끄럽고 수치스러워도 내 안에 숨어든 이 세바와 같은 죄악을 공동체 앞에 꺼내 놓으면 그 순간에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안에 세바가 무엇입니까?” 마치 큐티인 적용 질문처럼 여러분 이렇게 드리면 바로 그게 떠오르시나요? 우리 여러분 안에 세바와 같은 그런 죄악이 무엇이세요? 바로 떠오르지 않아요. 우리는 내 안에 어떤 세바가 숨어들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린 몰라요.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이 아끼시고 또 나를 아껴주는 목장에서 그냥 내 안에, 속에 있는 복잡한 생각들, 복잡하지 않더라도 하여튼 어떤 마음이 있더라도 어떤 생각이 있더라도 어떤 문제가 있더라도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그것을 하나 하나 하나 꺼내 놓을 때 여러분 속에 깊이 숨어 있는 그 세바도 뿌리째 딸려 나올 줄 믿습니다. ★목장에서 무엇이든지 나누시는 것이 내 안에 세바를 꺼내서 내어 던지는 것이라 이 말이에요. 아벨 성에서 세바가 이렇게 내어던져졌잖아요. 그런데 여기서 “야! 이제 반란 진압됐다!!” 이렇게 박수 치고 끝나면 안 됩니다. 이 승리에는 그늘이 있어요. 성은 살았지만 한 사람의 목숨은 날아간 거예요. 전쟁은 끝났지만, 이 교활한 -늘 다윗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 있는- 이 요압은 더 힘을 얻게 된 거예요. 그리고 반란은 진압됐지만 세바가 외쳤던 이 반란의 구호는 계속해서 이스라엘에 이어집니다. 그래서 놀랍게도 열왕기상 12장에 가면요, 이스라엘이 남쪽과 북쪽으로 갈라질 때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이 외쳤던 구호가 뭔지 아세요? “이새의 아들에게서 받을 유산이 없도다!” 세바가 외쳤던 그 구호와 똑같은 거를 그때 지금 반복하는 거예요. 계속해서 이어지는 겁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 ‘인간의 최선’이에요. ‘인간이 할 수 있는 충성의 최선’이 바로 여기입니다. 우리 인간은 아무리 잘해봐야 잠깐 그 문제를 진정시킬 수는 있어요. 그러나 그 문제를 영원히 해결할 수 없습니다. 잠깐 있는 일들은 진압할 수 있을지 몰라요. 그러나 영원한 우리의 문제인 ‘죄의 반란’ 죄와 사망의 문제는 진압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이 다윗 왕국을 지킨- 진짜 이 왕국을 지킨- 건 무엇일까요? 여인의 지혜인가요? 아니라고 말씀드렸어요. 그건 ‘인간의 최선’에 불과한 거예요. ★진짜 다윗 왕국을 지킨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그 약속̇̇을 하나님께서 지키셨기 때문입니다. 무슨 약속하셨나요? “네 집과 네 나라가 영원히 보전되리라” 우리 지금 열왕기상·하 계속 보면서도 이 약속을 지키시기 때문에 이끌어가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약속을 지키시는 거예요. 이것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이고요. 이걸 강하게 더 강하게 번역하면 단어가 똑같기 때문에 더 강하게 번역하면 하나님의 충성̇인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의 충성’이라고 하니까 좀 낯설죠. ‘하나님이 무슨 충성을 해?’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충성이에요. 왜요? 하나님이 자기 자리 지키시는 것이거든요. 여러분, 부모의 자리 여러분 지키기 쉬우세요? 아빠의 자리 떠나고 싶으실 때 있지 않습니까? 엄마의 자리 포기하고 싶을 때 있잖아요. 우리 아들이 저는 우리 아들이 뭐 그렇게 크게 속을 썩이지 않는데도 아빠의 자리가 참 힘들 때가 있더라고요. 근데 여러분 우리 자신을 보십시오. 우리 자신 같은 이 사람을 데리고 가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시겠어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 되신 그 자리를 지켜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이고, ‘하나님의 충성’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에 한 번도 안 나오세요. 그냥 이름으로만 등장하십니다. 하나님 대사 한마디도 없으세요. 그러나 이 약속을 붙드시고 무대 뒤에서 조용히 하지만 쉬지 않고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지금 일하고 계신 거예요. 그 증거가 뭐냐고요? 남의 말 들을 줄 모르는 이 요압̇ ̇이, 그리고 남의 말 들을 수 없는 그 두려움에 빠진 군중이, 백성̇ ̇이 이 무명의 여인의 말을 들었다는 거예요. ★말을 들을 수 없는 사람, 말을 듣기 싫어하는 사람이 그 한마디를 들었다는 것. 그 귀를 열어주셨다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무대 뒤에서 일하고 계신 것인 줄 믿고요. 지금 이 순간에도 말을 들을 수 없는 우리를 이 자리에 불러 모으셔서 주님의 말씀을 듣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충성하는 것들 끝에 가면요. 전부 다 요압처럼 말합니다. “그것만 내놓으면 내가 책임져 줄게. 그것만 내놓으면 내가 다 해줄게. 보장해 줄게. 살려줄게.” 그러나 마지막엔 우리 머리 요구하는 거예요. 여러분 ★어떠한 우상도 우리를 아끼는 우상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상은 늘 삼키는 거예요. 삼키는 거예요. 우리의 모든 것을 삼킵니다. 나 대신 죽어주는 우상은 이 우주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딱 한 분 이 우상들과 정반대로 하신 분이 계세요. 내놓으라 하지 않으시고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가 말했죠.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유익하다”2) 그랬어요. 이 세바를 넘기던 논리와 똑같은 논리예요. 그런데 그 ‘한 사람’이 누구냐가 모든 것을 다르게 만들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충성은 뜻밖의 자리에서 나왔어요. 무명의 여인! 이 무명의 여인에게서 충성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진짜 충성된 분은 가장 뜻밖의 자리에서 발견되십니다.반역자들이 처형되는 그 십자가̇ ̇ ̇! 그 십자가 위에서 발견되시는 거예요.충성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그 반역자들의 형틀에서 가장 충성되신 분이 나타나시는 겁니다. 멸시받고 버림받으시고 성문 밖에서 처형당하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히브리서 3장 6절은 뭐라고 말합니까?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충성하신 분”3)이라 그래요. ‘신실하신 분’이라고 그럽니다. 하나님의 온 집에 충성하신 그 충성으로 십자가를 지신 거예요. 요압은 남의 머리를 요구했고, 여인은 죄의 머리를 내어놓았어요.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머리를 내어주셨습니다. 세바는 자기 죄로 죽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아무 죄도 없이 저와 여러분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죽임당하셨어요.바로 이것이 충성의 최고봉!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십자가 사랑입니다. 여러분, 이 사랑을 저와 여러분이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우리도 내어던질 수 있는 거예요. 우리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만일 내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4) 빼어 내버리라. “내어던진다”는 게 뭡니까? “내어버린다”는 게 뭡니까? “하나님 저는 괜찮아요.”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100% 옳으시고 저는 그저 100% 죄인입니다” 이 고백하는 거예요. 나단 선지자 앞에서 다윗이 고백하잖아요.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주께서 의로우시다.5) 그 말씀이 맞습니다. 저를 정죄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맞습니다.”라고 하면서 인정하는 것이죠. 고백하는 것이죠. 그게 바로 회개인 거예요. 회개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사랑에 대한 최고의 응답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죄악을 내어던질 때, 털어놓을 때, 꺼내 놓을 때 우리가 살아나는 거예요. 망하는 길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나는 겁니다. 왜요? 그 던져져서 비워진 그 자리에 그게 빈자리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그 자리에 오시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에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내 안에 세바가 나간 그 자리에 진짜 충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들어와 살고 계십니다. 그래서 연약한 우리도, 절대로 충성할 수 없는 우리도 충성된 자로 설 수 있는 겁니다. 내 힘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힘에 힘입어서 말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충성을 이렇게 의지하여서 이번 주에 구체적인 것 하나 여러분 안에 있는 그 세바 하나 이거 목장에서 꺼내고 내어놓으시고 고백하시고 회개하셔서 진정한 충성된 자로 굳게 서시기를 축복합니다.
▪ 적용질문
Q. 내 안의 세바는 무엇입니까? 삭이지 못한 억울함입니까, 오래 품은 원망입니까, ‘나만 옳다’는 자기 의입니까, 습관이 된 자기방어입니까?
Q. 이번 주 목장에서 오픈하고 회개할 한 가지는 무엇입니까?
목장 중보기도입니다
같이 기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가
1. 시절인연을 잘 흘려보내고 나만 억울하다 옳다고 생각하는 세바를 회개하며 갈 수 있기를
2. 아빠의 사업장에 관여해 주시고 모든 과정이 하나님께 속했으니 하나님께서 끝까지 책임져 주시기를(아빠의 잔소리폭격이 심한데 잘 듣고 넘길 힘 허락해 주시길)
3. 우리 목장을 지켜 보호해 주시고 한 주 살아갈 힘 주시기를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으로 자존감 회복되기를
4. 유제품 멀리하고 밀가루 줄이기 12시 전에 취침하는 적용할 수 있도록!!이번주 운동 2번 이상 꼭 적용하기
5. 직장지체와 적당한 거리 유지하면서 지혜로 대하고 미워하지 않도록!
6. 알맞은 때와 방법으로 부모님과 분리되는 길을 꼭 열어 주시기를 (제발요)
7. 신교제에 소망을 갖고 간절함이 회복되기를
8. 첫째조카 공부하는데 지혜 주시고 삶의 이유와 목적을 하나님께 둘 수 있기를
9. 엄마 간검사 결과가 안좋은데 구원의 사건으로 잘 해석하고 회복의 은혜 허락해 주시기를!!
나
1. 저희 어머니 자궁내막암 대장암 잘 유지되게 중보기도 부탁드립니다.
2.신교제를 하고 있는데 감사함을 잊지말며 건전한 신교제가 되기를
3.제 동생 가족 구원을 위해
4.제 동생 가족 내년 한국 들어온 다는데 거처와 직장을
5.교회와 목장 사랑부 그리고 십일조 생활 잘 유지되게
6.직장 고난이 있어 마음이 힘든데 감정에 휩쓸리지 말고 질서의 순종하며 나아가기를
다
1. 회사 일이 늘어날 수 있는데 그 안에서 저의 인정받고자 함을 잘 보고, 내 안의 세바를 내어던지는 한 주 될 수 있기를 (회사 이사 이슈가 어떻게 될런지, 주님 뜻에 맞게 인도 되기를)
2. 이제 집을 보기 시작하는데, 형편과 상황에 맞는 집이 나타나고, 적절한 시기에 구해 질 수 있도록
3. 여름이 다가와 엄마 아빠 체력이 떨어지니, 두 분 모두 예민해지고 힘들어하시는데, 여름 잘 보내실 수 있도록
라
1. 성령충만..산당을 세우지 않도록..
2. 가족들의 영혼 구원과 건강
(아버지의 치매로 인하여 아버지, 어머니 모두 힘들어하시는데 두 분 모두 잘 이겨내시고 구원 받으실 수 있도록)
3. 신교제, 신결혼 이제는 내려놓을 때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드는데, 하나님은 내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시는지 깨달을 수 있게 해주시기를..
4. 직장과 가정에서 빛과 소금 감당할 수 있게
5. 퇴근 이후 자격증 시험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체력과 지혜 부어주시기를.
6. 다음 진로를 위한 준비 잘 할 수 있도록 해주시고 그 길을 열어주시도록.
7. 어쩌면 이번 목장이 우리들교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데, 어느 방향이든 주님께서 이끌어주시기를..
마
1. 아버지 황인수 항암 & 영혼 구원
2. 7/23 목 ~ 7/31 금 여름 휴가 의미있고 알차게 보내도록
3. 다이어트! 식욕 억제! 마운자로 좀 잘 먹혀서 식탐 없어지기를...ㅠㅠ
4. 어머니 박현숙 긍휼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마음을 치유해 주시고 회복시켜 주세요
바
1. 하나님보다 앞서 있었던 세상의 관심과 욕심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마음을 회복할수 있도록
2. 매일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습관이 회복될수 있도록
3. 하나님의 뜻 안에서 가장 좋은 때에 예비된 배우자를 만날수 있도록
4. 가족 모두가 건강하고 감사와 기쁨으로 하루를 살아가도록
5. 유치원에 맡고 있는 열매반 친구들이 다치지않고 안전하고 행복하게 생활할수 있도록
6. 충분한 수면과 적절한 운동을 실천해서 건강을 잘 관리하는 지혜를 허락할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