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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02 목장보고서 (김지용 00)
산당을 다 제거하되](열왕기하 23장 15~20절)요시야의 개혁을 읽어오고 있었다. 요시야는 우상을 가루로 빻아서 다윗이 눈물을 흘리던 기드온 시내에 흘려보냈다. 가장 위험한 건 산당 예배이다. 기복적으로, 별 뜻도 없이 나온다. 산당은 불살라져야한다. 열왕기하는 산당에 대한 태도로 왕들을 평가하고 있다. 언약궤가 없으니 산당에서 드릴 수 밖에 없었다. 솔로몬도 기드온에서 1천번제를 드리곤 했다. 남유다 초대왕인 루호보암이 산당예배에 기초를 쌓고, 선한 히스기야는 산당제사를 불완전하게 했지만 므낫세가 다시 재건함으로 산당 믿는 자로서 뿌리 깊은 집안이었다. 요시야 한 명만이 남북 통틀어 기복을 거스른 사람이 딱 하나란 뜻이다. 기적의 개혁이었다. 내가 도저히 포기못한다는 한가지가 다들있다. 우상을 가루로 만든 그 손이 징하디 징한 300년 버틴 산당 앞에서 서고 제거한다. 1. 뿌리까지 헐어야 끝납니다.(15) 요시야는 이미 유다 끝에서 우상을 제거했다. 자기 선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기에 멈춰도 할말이 없는데 또한으로 본문이 시작한다. 벧엘 산당이 하루 아침에 생긴게 아닌데, 요시야는 국경 끝으로 가서 벧엘 산당으로 간다. 솔로몬의 불신결혼으로 인해 산당이 변질되어 우상 숭배로 이어졌다. 산당은 알기 쉽게, 번영신화, 기복주의라 누구도 끊기 어렵다. 하나님을 섬기는데 그 자리에 금송아지가 있어서 너무나도 열심히 섬긴다. 나도 속고, 남도 속는 신앙이다. 요시야가 벧엘 지역까지 종교 개혁을 단행한 것은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한 상황에서 정치적 위협까지 무릅쓰고 간 것이다. 거기에 뿌리가 있기 때문이다. 북이스라엘의 죄의 뿌리인 금송아지가 있는 곳이다. 여로보암이 우상 숭배 정책을 후대 왕들이 그대로 이어가다가 악순환이 이어지는 곳에 북이스라엘의 국보가 된 곳이다. 요시야의 개혁은 직계 조상들을 비롯해 통일 왕국의 부강했던 솔로몬 왕까지 개혁 대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드디어 북쪽의 시초인 여로보암을 개혁 대상으로 놓은 것이다. 여로보암이 금송아지를 세운 이유는 성경에 그대로 명시되어있다. 백성들이 예배드리러 가서 감화되고 나라가 무너질까봐 하나님께 예배하러 가는 발걸음으로 막는 것이다. 백성에게 한 말은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갈 필요가 없다고 협박이 아닌 좋은 소식처럼 들리게 했다. 가깝다고 좋은 교회는 아니다. 산당예배의 시초가 이것이다. 어디에 살든 국경을 넘을 일이 없게 해준 것이다. 그리고 빛나는 형상까지 준 금송아지이니 눈 앞에 보이는 금송아지가 하나님보다 좋아보여 백성 입장에서는 손해가 아니다. 예배가 없어진 게 아닌 편해진 것이다. 불편한 부분만 조금씩 바꾼 것이다. 산당은 하나님이 정한 자리에서 내가 편한 자리로 옮긴 것이다. 성경은 이 편하게 바꾼 것이 죄라고 말씀하신다. 한번 자기가 정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절기도 자신이 정하고, 여로보암이 어마어마한 권세가 생기니 모두가 맞다고 생각을 한다. 영적인 일이 육적인 일로 바뀌고 편하게 하겠다고 한 일이 하나님 자리에 자신이 올라가는 일로 변질되었다. 여로보암은 자기가 하나님을 버렸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사람의 변명은 솔로몬이 치니 자기가 살려고, 지키려고 조금 바꾼 것 뿐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말씀을 내 형편대로 바꾸는 순간 하나님을 내 등 뒤에 놓는 것이다. 내일 시험이니, 관계가 깨지면 안되니까하며 사정을 두며 내게 편한 예배만 남는다. 그러면서 난 예배를 드렸으니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산당의 뿌리는 두려움에 있다. 요시야는 제단만 부수고 그만두지 않았다. 빻고 헐고 가루로 만든다. 파괴에 그치지 않고 부정하게 만들어 다시는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그렇게 구체적으로 요시야가 개혁을 했다. 우리도 구체적으로 큐티를 하려면 차단할 건 차단하고 내 두려움과 계산까지 버려야 또 올라오지 않는다. 없앤게 아니고 자리만 옮겨 놓은 것과 같다. 죄는 자리만 바꾸면 계속해서 달라져 돌아온다. 그래서 큐티를 해서 내 죄의 뿌리를 찾아내야한다. 이렇게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남는 나의 죄의 뿌리를 산당이라고 한다.적용: 무엇을 잃을까봐 두렵습니까? 그 두려움 때문에 어쩔 수 없다며 바꾼 예배나 순종이 있습니까? 이것만은 내 방식대로 하겠다고 버티는 한가지는 무엇입니까? 믿음의 반대는 내 열심이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그 위가 있기 마련이다. 내 열심이 돈이 나를 산산조각내는 것과 비슷하다. 2. 여호와의 말씀대로 끝납니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말씀이 임해야만 산당을 없앨 수 없다. 왜냐하면 내가 금송아지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16) 말씀을 찾아내야한다. 요시야가 열심히 개혁한 것들이 16절에서 왕이 몸을 돌이킨다. 무덤에서 해골을 꺼내 불살라 다시는 못 쓰게 하는 것이다. 그 전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되었더라라고 하는 말씀을 이해하려면 300년 전으로 올라가야한다. 북이스라엘의 새 예배가 시작되는 날, 왕이 제단 위에 있는데 유다에서 사람이 와서 하나님의 사람이라며 말하던 사람이 왕에게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제단에게 말을 한다. 다윗의 집안에서 요시야가 나와 불사를 것이라고 말을 한다. 23장에서 요시야는 왕으로만 묘사된다. 하지만 16절에서 처음으로 요시야라는 말이 나온다. 300년 전 예언에 박혀있던 이름이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 아침 읽은 말씀도 잊고 주일 예배도 잊고 내 경우에는 다르다고, 우리 집안은 경우가 다르다고 외친다. (17,18) 그 비석은 바로 요시야의 개혁을 예언했던 묘실이었다. 하나님의 사람을 벧엘로 보내면서 조건을 거신다.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말고 왔던 길로 돌아오지도 말고 말씀만 딱 전하고 오라고 하신다. 벧엘의 그 늙은 선지자가 쫓아와서 너와 같은 선지자라고 거짓말하며 먹고 마시고 쉬라고 속인다. 결국 하나님의 사람은 사자에게 잡아먹히고 만다. 왕 앞에서도 꿈쩍 않던 사람이 너와 같은 선지자라고 거짓말에 넘어가고 만다.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말씀을 맣은 사람도 이렇게 넘어진다. 목회자나 부모에게 실망할 수 있다. 그러나 목장, 목자, 부모 때문에 교회를 떠나고 하나님의 말씀마저 놓아버리면 나를 살릴 내 주를 내 손으로 놓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 또한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기에 나 때문에 말씀을 놓아버린 경우는 없는지 또 돌아봐야한다. 내가 기다리다 지쳐 버린 말씀을 하나님은 폐기하신 적이 없다. 듣기 좋은 말씀만 말씀이 아니다. 요시야는 이미 재앙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벧엘의 말씀이 300년만에 이루어진 것처럼 심판의 말씀도 반드시 돌아오신다. 산당은 여전하다. 선지자가 외치고 나라가 망해도 버텼다. 그러나 말씀은 더 여전했다. 아무리 그래도 끝까지 살아남는 것은 말씀 밖에 없다. 300년을 버틴 제단도 말씀 앞에선 하루도 버티지 못한다. 내 안의 산당을 계속해서 찾아내고 제거해야한다. 적용: 오래 기도해도 안되어 우리 집안에는 안 되나 보다하고 덮은 말씀이 있습니까? 사람에게 실망해서 말씀까지 놓아버린 적은? 오늘 말씀이 제단아 제단아 하고 콕 집은 내 산당은? 300년 뒤에도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습니까?3. 예배로 돌아와야 끝납니다. (19) 열왕기의 오랜 꼬리표가 여기서 뒤집힌다. 선한 왕이 나올때마다 붙던 꼬리표인 산당이 요시야가 다 제거한다고 나온다. 수백년동안 반복되던 그 말이 뒤집힌 것이다. 19절이 겨냥하는 것은 이방인들의 신들이 아닌, 우상이 아닌 하나님을 섬긴다는 산당이 더 격노하게 하셨다고 한다. 아들 므낫세가 금세 다시 세운 일처럼, 우리도 주일에는 히스기야를 부르짖다가 월요일이 되면 므낫세를 부르짖는다. 여로보암 한 사람의 죄가 여러 왕의 관행이 되고 나라가 망한 뒤에도 살아남았다. 산당을 끝낸 것은 요시야의 망치가 아니다. 하나님의 순종을 통해 마침내 끝내신 것이다. 산당을 제거하지 않고 있으니 백성들을 제거하셨다. 회개로 내어놓지 않은 산당은 심판으로 드러난다. 끝내 산당을 붙들고 있었기에, 하나님보다 금송아지를 붙들었기에 하신 일이다. 우리도 끝까지 돈을 붙든다. 요시야가 왜 여기까지 갔을까란 생각을 해야한다. 개혁을 멈추지 않고 이미 망해버린 옛 형제의 땅까지 갔다. 남의 일로 버려두지 않고 나의 책임으로 여겼다. 세금이 더 늘어가거나 얻을게 있어서 가는 게 아니다. tt도 내 돈 내고 어딜 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가서 하지 못하던 이야기를 하고 새로운 것을 배운다. 하나님이 옳으시기 때문에 가는 것이다. 그것 말고 이유가 없다. 산당 제사의 반대, 산당은 잘되려고 하는 예배이고 요시야는 잘될게 하나도 없어도 드리는 예배이다. 잘 될게 하나 없어도 드리는 예배만이 산당 예배를 이길 수 있다. 기복적으로 안되어도 드리는 예배이다. 이뤄주지 않으셔도 드리는 예배이다. (20) 제사장을 죽이라는 말을 육적으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북이스라엘은 앗수르 때문에 망한 것이 아닌 우상 숭배 때문에 망했다. 남유다는 바벨론 때문에 망한 것이 아닌 자기 죄를 보지 못해서 망했다. 우리는 여러 이익관계 속에서 나아가는게 아니라 영혼구원의 안목으로 나아가야한다. 산당의 제사장들을 죽이라고 한 것은 구약에 있는 언약 심판이다. 죽여야 할 것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닌 내 안의 산당과 우상이다. 항상 내 책임이라고 생각하며 울고 회개하며, 옳고 그름으로 이겨선 안된다. 마지막에 본문 마지막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고 끝난다. 그는 결국 마지막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예배의 자리로 돌아온다. 우리는 산당을 없애고 예배의 자리로 돌아와야한다. 끊는 결심은 했으나 말씀을 보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비워놓은 그 자리에 또 새 산당이 생기는 것이다. 산당을 비워놓는 것은 회개가 아니다. 하나님께 돌아와 예배드리는 것이 회개의 완성이다. 마지막으로 제거해야할 것은 내 굳은 마음이다. 우리의 인생을 결정하는 것은 이성과 감정이 아닌 죄이다. 죄 때문에 공부하고 열심을 내고 복수심을 품는다. 우리는 이것을 내가 제거하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만이 새 영과 새 육신으로 주실 수 있는 것이다. 요시야는 잘못된 예배의 자리를 제거했고 하나님은 참된 예배의 자리를 열어주셨다. 하나님은 산당을 비우신 그 자리를 참된 예배의 자리로 마련하셨다. 적용: 응답이 없어서 그만둔 기도나 예배가 있습니까? 끊었다가 도로 살아난 습관이나 죄는 무엇입니까? 내가 다시 찾아갈, 버려진 벧엘 같은 한사람은 누구입니까? 회개로 예배가 완성되었습니까?산당을 비워놓는 것이 회개가 아니고 예배로 돌아오는 것이 회개의 완성이다. 그러나 죽어도 회개가 되지 않는 것이 심판이다. 교회와 목장에서 타작을 잘 당해서 쭉정이를 날려보내야 그 자리에 예수님이 찾아오실 것이다. 이어지는 산당의 제사는 뿌리까지 헐어야 끝난다. 열심히 인생을 살아본 사람이 얘기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아무리 가도 더 높은 사람이 있다. 결국은 말씀이 덧붙여져야만 끝난다. 예배의 회복, 회개로 돌아와야 끝나는 줄 믿는다. 우리의 싸움은 육이 아니고 혈기가 아니다.
- 참석자ABCDEF- 한주간 어떻게 살았는지A: 먼큐했음. 수요예배 다녀옴. 금요일에는 서울숲교회에서 예배 방송실 담당해달라고 해서 다녀옴. 이번주 계속 교회일 때문에 바빴음. B: C: 열심히 놀았음. 요즘 연락하는 여자애가 생김. 같이 새벽 피시방 자주감. D: 알바하면서 열심히 지냄. 아버지가 친구가 왜 없냐고 갈구심. E: 장교 시험 합격함. 기도 많이 하고 운동하면서 잘 지내고 있음. F: 똑같이 공부하면서 지냄. - 기도제목A: 내 안에 남은 산당을 잘 제거할 수 있도록. 하반기 행사 준비를 내 힘이 아닌 온전히 기도로 맡길 수 있도록. B: 신교제, 신결혼. 실습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C: 다음 학기 시간표, 계획 잘 짤 수 있도록. 미취학부 피드백 잘 다녀올 수 있도록.D: 알바 잘 버틸 수 있도록. 성실하게 살 수 있도록. E: 합격 이후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국가를 지키는 장교가 잘될 수 있도록 운동이랑 공부 열심히 할 수 있게. F: 다음주 형이 본가에 오는데 가정이 회복의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도록. 공부 열심히 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