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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02.(주일) 열왕기하 23:15-20 「산당을 다 제거하되」 김양재 목사님
오늘 읽을 말씀은 열왕기하 23장 15절에서 20절까지입니다.15. 또한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벧엘에 세운 제단과 산당을 왕이 헐고 또 그 산당을 불사르고 빻아서 가루를 만들며 또 아세라 목상을 불살랐더라16.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산에 있는 무덤들을 보고 보내어 그 무덤에서 해골을 가져다가 제단 위에서 불살라 그 제단을 더럽게 하니라 이 일을 하나님의 사람이 전하였더니 그 전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되었더라17. 요시야가 이르되 내게 보이는 저것은 무슨 비석이냐 하니 성읍 사람들이 그에게 말하되 왕께서 벧엘의 제단에 대하여 행하신 이 일을 전하러 유다에서 왔던 하나님의 사람의 묘실이니이다 하니라18. 이르되 그대로 두고 그의 뼈를 옮기지 말라 하매 무리가 그의 뼈와 사마리아에서 온 선지자의 뼈는 그대로 두었더라19. 전에 이스라엘 여러 왕이 사마리아 각 성읍에 지어서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산당을 요시야가 다 제거하되 벧엘에서 행한 모든 일대로 행하고20. 또 거기 있는 산당의 제사장들을 다 제단 위에서 죽이고 사람의 해골을 제단 위에서 불사르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더라(아멘.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산당을 다~ 제거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것인지 알아 저희들도 산당을 다 제거할 수 있도록 오늘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듣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우리는 ‘요시야의 개혁’을 읽어오고 있어요. 이때는 므낫세와 아몬이 57년 동안 온 나라를 우상 천지로 만들었던 시대죠. 요시야는 우상을 가루로 빻아서, 다윗이 눈물을 흘리고 걸었던 기드론 밭에서, 묘지에서, 시내에서 뿌리고 흘려보냈다고 했어요. 그런데 가장 심각한 죄가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고 기복으로 기도하고 죄책감도 없는 이 ‘산당 제사’예요. 남북에서 가장 심각한 죄가 바로 ‘산당 예배’인데요. 그래서 23장 20절까지 ‘산당’이 9번, ‘불사르고’가 8번이 나와요. 그만큼 산당은 불살라져야 합니다. 이 똑같은 사건이 역대하에는 한 번만 나오는데요. 그래서 저자의 의도를 좀 봐야 하는데, 열왕기는 이 ‘산당에 대한 태도’로 왕들에 대한 평가를 내리고 있어요. 솔로몬 이전, 또 다윗부터 시작됐어요 이 산당 제사는. 그때는 언약궤가 없었기 때문에. 그런데 남유다 초대 왕인 르호보암이 아주 산당의 기초를 쌓았어요. 그리고 가장 악한 왕은 므낫세이고요. 부분적으로는 선하지만 산당은 제거하지 않는 왕은 아사, 여호사밧, 요아스, 아마샤, 아사랴, 요담 여섯 왕이고요. 선한 히스기야 왕은 산당 제거를 불완전하게 했지만 금세 므낫세가 다시 재건함으로. 이 산당은 특히 믿는 자로서 아주 뿌리 깊은 우상이었어요. 남북 통틀어 요시야 한 명만이 산당을 제거했어요. 기복에서 완전히 벗어난 왕이 딱 한 명 나왔다는 것이죠. 이건 기적의 개혁을 한 거예요. 다들 그래요. ‘나는 아무리 교회를 나와도 돈과 술은 포기 못 하겠다.’ 다들 그런 거 있어요, 절대로 포기하지 못하는. 그래서 우상을 가루로 만든 그 손이 오늘은 징하디 징한 300년 묵은 바로 그 산당 앞에 섭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을 다 제거해요. 이 여전한 산당 제사는 어떻게 끝이 날까요? 첫째로, 1. 뿌리까지 헐어야 끝납니다(15절)뿌리까지 헐어야 되요. 15절입니다. 15. 또한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벧엘에 세운 제단과 산당을 왕이 헐고 또 그 산당을 불사르고 빻아서 가루를 만들며 또 아세라 목상을 불살랐더라_왕하 23:15요시야는 이미 남쪽 끝에서 북쪽 끝까지 산당을 헐고 빻고 우상을 제거했어요. 자기 나라에서 할 수 있는 개혁은 이미 끝까지 한 거예요. 여기서 멈춰도 누가 뭐라 그럴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그런데 오늘 본문이 무슨 말로 시작합니까? ‘또한’으로 시작이 돼요. 요시야는 멈추지 않고 국경을 넘어 ‘벧엘’로 갑니다. 이 벧엘 산당이 하루아침에 생긴 게 아니라고 했어요. 성전이 세워지기 전에는 -그때 언약궤가 없었던 시절이 있잖아요- 각 지역 산당에서 하나님께 제사하도록 허락을 한 것, 이게 잘못된 거죠. 그래놓고는 솔로몬이 불신결혼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이방신을 위한 산당을 세웠고, 그다음에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은 아예 금송아지 산당 제사를 나라의 예배 제도로 만들어 버렸어요. 그러니까 정말 하나의 (잘못된) 결정이 이렇게 되는 거예요.한마디로 쉽게 ‘산당’은 ‘번영 신학’, ‘기복주의’라 이거는 끊어지는 게 아니에요. 누구도 끊기가 어려워요. 그런데 ‘산당이 왜 힘든 건가’ 하면은, 하나님을 금송아지 자리에 놓고 열심히 섬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금송아지를 보고 하나님이라고 그러잖아요. 그죠? 그러니까 나도 속고 남도 속이는 신앙인 거예요. 대상이 ‘하나님’이라고 그러는 거예요. 그리고 지금 ‘돈’을 섬기는 거잖아요.이처럼 요시야가 벧엘 지역에까지 종교 개혁을 단행한 것은 북이스라엘이 이미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하고 앗수르의 속국으로 전락하고만 상황에서 정치적인 마찰까지 무릅쓰고 요시야가 거기를 직접 찾아갔어요. 왜죠? 거기 (죄의) 뿌리가 있기 때문이에요.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세운 제단과 산당. 북이스라엘이 저지른 죄의 뿌리 바로 금송아지를 섬기는 자리예요. 이는 마치 첫 단추부터 잘못 채운다는 말처럼 여로보암의 우상숭배 정책을 북이스라엘의 후대 왕들이 그대로 이어받아서 악순환이 계속된 거예요.여러분, 여로보암은 북이스라엘의 국부예요, 국부. 그러니까 요시야의 개혁은 자기 직계 조상인 아버지, 할아버지 므낫세와 아몬을 다 겨냥했잖아요. 그죠? 그들의 일월성신을 다 훼파했어요. 그리고 가장 유다에서 존경하는 (너무 부강했기 때문에) 솔로몬 왕까지도 개혁 대상으로 삼았어요. 우상숭배의 원조 솔로몬.그리고 북쪽의 건국의 아버지인 여로보암을 이제 개혁 대상으로 놓는 거예요. 대단한 거죠. 여로보암이 왜 그랬을까요? 그냥 자기가 의로워서 그런 게 아니라 성경이 그의 속마음을 그대로 적어놨어요. (여로보암이) 개혁하고 보니까 무서웠어요. (백성이) 얼마나 여로보암을 따랐는지, 통일 왕국의 열두 지파 중에서 열 지파가 여로보암을 지지했어요. 그래서 개혁을 한다고 나왔는데, 나오고 보니까 ‘백성이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가면 마음이 돌아설 거다. 그러면 내 자리도, 목숨도 없다.’ 그러니까 여로보암이 막고 싶었던 것은 하나님이 아니고요, 백성이 하나님께 예배하러 올라가는 그 발걸음이었어요. 여러분, 내 예배는 큰 사건으로 무너지지 않아요. 이렇게 나가려던 발걸음 하나가 멈추면서 무너지는 거예요. 그래서 백성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왕상 12:28).협박이 아니에요. 오히려 좋은 소식처럼 들리게 했어요. ‘먼 길 갈 것 없다. 시간 뺏길 것 없다. 이제 그냥 가까운 데서 예배를 드려라.’ 그러니까 여러분, 다른 건 몰라도 가깝다고 좋은 교회는 아니에요. 그렇잖아요. 그죠? 우리가 금송아지 섬기러 갈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야말로 산당 예배일 수 있어요. 그래서 금송아지를 남쪽 끝 벧엘과 북쪽 끝 단에 두었습니다. 어디 살든 국경 넘을 일 없이 제사드릴 수 있게 해준 거죠.게다가 눈에 보이는 형상까지 줬어요. 그것도 번쩍번쩍 빛나는 금이에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앞에 보이는 금송아지가 얼마나 든든했겠습니까? 그러니까 백성 입장에서 이건 손해가 아니죠. 예배가 없어진 게 아니라 편해진 거예요.우리도 예배를 버리지는 않아요. 불편한 부분만 조금씩 바꾸는 거예요. 멀리 갈 것 없고, 손해 볼 것 없고, 관계 깨뜨릴 것 없고, 내 자리 내놓을 것 없는 그 예배를 찾습니다.물론 예배 하나 지키려고 집과 생업을 버리고 남유다로 내려간 제사장과 레위인들도 있었어요. 그러나 대다수 백성은 그대로 남았습니다. 편한데 뭐가 문제였겠어요? 여러분은 (북이스라엘에) 남아 있는 쪽이세요? (예배드리러 남유다로) 짐 싼 쪽이세요? 그냥 앉아 있는 쪽이세요, 종교의 자유를 찾아서 내려온 우리 집안도 별반 다를 게 없네요. 정말 내려왔다고 또 대단하고, 남아 있다고 이상하고 사실 그건 아니겠지만요.산당이 뭡니까? 예배를 없애는 게 아니에요. 예배를 꼭 드리되 내 형편에 맞게 고치는 거예요. 하나님이 정하신 자리에서 내가 편한 자리로 옮기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은 이걸 딱 한 줄로 판결을 합니다. “이 일이 죄가 되었으니.” (열왕기상) 12장 30절이죠. 편한 게 죄가 되고 말았어요. 한번 자기가 정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어요. 장소를 바꾸더니 제사장도 자기가 세우고 절기도 자기 마음대로 정합니다. 왜냐하면 이제 국부가 되어서 여로보암이 자기 말한 대로 다 되는 거예요. 권력이 생기니까 마음대로 다 정하는 거예요. 영적인 일을 육적으로 바꿔가지고. 오직 예배를 부르짖으면서 처음에는 ‘조금 편하게 예배하자’였는데 나중에는 이렇게 예배의 모든 것을 자기가 정합니다.그렇게 한 사람의 계산이 한 나라를 통째로 죄로 끌고 들어갔고, 그 산당이 무려 300년을 갔어요. 여로보암은 죽었는데 산당은 안 죽었어요. 내가 세운 산당도 나보다 오래 살아서 내 자녀가 물려받습니다.그런데 여로보암은 자기가 하나님을 버렸다고 생각하지 않았겠죠. 그죠? 않았으니까 회개하지 않았죠. 당연히 이 사람의 변은 “솔로몬이 이상하니까 살려고 개혁했다!” 이거예요. 솔로몬이 천 명의 여자를 얻어 들이고 있으니까. 그래서 자리 지키려고 조금 바꿨을 뿐이라고 생각했겠죠. 그러니까 ★개혁을 이해타산으로 하면 그 개혁이 훗날 또 개혁의 대상이 될 거예요.그러나 하나님은 정확히 말씀하십니다. “나를 네 등 뒤에 버렸도다”(왕상 14:9).★말씀을 내 형편대로 바꾸는 순간 하나님을 등 뒤에 버린 거예요. 여러분 무엇을 잃을까 봐 말씀을 바꾸고 있습니까?“애가 시험이니까 아휴~ 이번 주일은 어쩔 수 없고…, 이번 큐페는 어쩔 수 없고…” “이 관계는 깨지면 안 되니까 이 정도 타협은 괜찮고…” “아이고, 이 돈은 여기까지는 봐 주시겠지?” 하지 않습니까? 다 이유도, 사정도 있어요. 그렇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정하신 예배는 없어지고 내가 편한 예배만 남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믿음 좋다’고 생각해요. 나는 어쨌든 예배를 드렸으니까. 금송아지를 예배드렸는지 하나님을 예배했는지 여러분은 상관이 없어요. 나는 가서 무조건 빌고 왔으니까, 난 예배드렸으니까.★산당의 뿌리는 우상보다 먼저 두려움이에요. 두려움으로 와서 예배를 드리죠. ‘애가 떨어지면 어떡해’ ‘직장이 안 되면 어떡해.’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고 내가 지키겠다고 하는 이 두려움. 내가! 내가 하겠다는 거기에 두려움이 있어요.요시야는 제단만 헐고 그만두지 않았어요. 헐고 불사르고 빻아서 가루로 만듭니다. 산당을 파괴하는 정도가 아니라, 부정하게 해서(더럽혀서) 다시는 성소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도록 해야 하는데, 14절, 16절에 거기를 ‘해골로 채웠다’는 것이 그것이에요. 산당이 완전히 해골로 채워졌어요. 그러면 우리는 죽음을 무서워하기 때문에 ‘해골’ 그러면 가기가 싫은 거예요. 이 정도로 구체적으로 요시야가 개혁을 한 거예요.우리도 끊을 건 끊고, 지울 건 지우고, 차단할 건 차단해야 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멈추면 안 돼요. ★그 제단을 처음 세운 내 두려움과 계산까지 내려가지 않으면 산당은 다른 얼굴로 또 올라와요.집을 정리하다 보면 분명 버린 줄 알았던 물건이 다른 서랍에서 또 나올 때가 있죠. 없앴던 게 아니라 자리만 옮겨 놓았던 거예요. 우리 죄도 그래요. 돈을 내려놓은 줄 알았는데 자녀에게 가 있고, 사람을 의지하는 마음를 끊은 줄 알았는데 어느새 그 자리와 인정에 가 있어요. 죄는 없어지지 않고 얼굴과 자리만 바꾸어서 계속 다시 나타납니다. 그 뿌리는 내가 눈 감고 앉아서 찾아낼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요시야를 벧엘까지 데리고 간 것도 자기 열심이 아니에요. 성전에서 발견된 ‘말씀’이에요. 하나님 말씀으로 내 죄가 처음 시작된 그 자리까지 나를 데리고 가시는 거예요.‘벧엘’이 무슨 뜻이에요? ‘하나님의 집’이에요. 그런데 이름은 ‘하나님의 집’인데 예배는 자기 마음대로 드리는 거예요. 그게 벧엘이고, 그게 바로 나예요. 성경은 이렇게 끝까지 남는 자리를 ‘산당’이라고 하는 거예요. 끝까지 포기하지 못하는 그 나의 자리. ▪ 적용 질문Q. 무엇을 잃을까 봐 제일 두렵습니까?Q. 그 두려움 때문에 ‘이번만은 어쩔 수 없다’며 바꾼 예배나 순종이 있습니까?Q. ‘이것만은 내 방식대로 하겠다’고 버티는 한 가지는 무엇입니까?“절대로 나는 돈은 포기 못 해!”, “술은 포기 못 해!” 이런 일들이 우리 가운데… “이것만은 못 내려놔!” 여러분들의 도파민이 나오는 거는 종류가, 운동하는 그 도파민 때문에 운동을 포기를 못 해서 운동하다가 돌아가시는 분도 있어요. 너무 좋아가지고. 좋으니까 하겠죠. 그죠? 저를 생각해 봤어요. 내가 너무 이제 어려서 살기가 힘드니까, ‘아! 나도 교회를 갔는데 금송아지 숭배하러 갔구나.’ 그러니까 아낙의 크고 강한 것들은 더 강한 아모리에 의해서 멸망한다고 했잖아요(신 2:21). 신 2:21 그 백성은 아낙 족속과 같이 강하고 많고 키가 컸으나 여호와께서 암몬 족속 앞에서 그들을 멸하셨으므로 암몬 족속이 대신하여 그 땅에 거주하였으니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나의 최고는 더 강한 것에 의해 산산이 부서지는 경험을 했잖아요. 이게 축복이었죠. 이름은 ‘하나님의 집’ 벧엘로 시집을 갔는데, 이제 부모님의 꼭두각시가 되어서, 주일에는 손잡고 가고, 주중에는 나가지 말라고 하시니 그걸 순종이라고 타협을 한 거죠. 우리 시댁은 당회가 열릴 때를 대비해, 항상 너무 열심히 청소를 해놓으셨어요. “(우리집은) 24시간 언제 와도 깨끗하다.” 이거를 보이기 위하여. 그러면서 ‘주중 예배와 봉사는 50 넘어서 하라’는 이 시댁의 방식이 있었어요. 분명히 우리 집은 믿는 집인데, 금송아지를 섬기는 것처럼, 그것이 순종은 아닌데… 내가 시댁을 섬기는 것이 그 순종은 아닌데, 순종한다고 이제 못 나간 거죠.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시집살이를 열심히 하고, 공부를 열심히 해도 이 뿌리까지 헐어낼 수가 없는 거예요. 예. 그러니까 어려서부터 종류가 다른 금송아지에 내 노력으로 산당 제사를 드렸다고. 이번에 묵상하다 보니까. 그러니까 ★열심이 없는 사람은 산당 제사도 못 드려요, 여러분! 그래서 이게 안 없어지는 거예요. 유다의 (모든) 왕들이 산당 제사를 폐하려고 했지만 폐하지 못했죠. 내 열심이 하늘을 찌르니까. 그래서 믿음의 반대는 ‘내 열심’인 거예요. 그러니까 아무리 내 힘으로 뿌리를 헐어보려고 해도 안 되는 거예요. 두 번째는 이게 어떻게 제거하냐면, 2. 여호와의 말씀대로 끝납니다(16-18절)그러니까 말씀이 임해야 산당 예배가 끝나게 되는 거예요. 말씀이 임하기 전에는 … 내 열심대로 살다가는 이제 끝에 가면 부서지는 거 있어요. 열심히 살다가 지옥에 가는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열심히 산 사람이 이 얘기를 하라고 지금 저를 여기 세웠어요. 내가 농땡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내 힘으로 별도 따고 해도 따고 할 것인데, 딱 부서뜨리니까 하나님이 나를 부서뜨리셔야 돼요. 저는 저를 부서뜨릴 수가 없는 사람이에요, 제가.자, 16절이에요.16.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산에 있는 무덤들을 보고 보내어 그 무덤에서 해골을 가져다가 제단 위에서 불살라 그 제단을 더럽게 하니라 이 일을 하나님의 사람이 전하였더니 그 전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되었더라_왕하 23:164절부터 15절까지 요시야가 한 것이 부수고 태우고 빻고 더럽히고. 12절이 전부 그 이야기예요. 숨 쉴 틈이 없어요. 근데 16절에서 갑자기 화면이 정지가 되고 왕이 몸을 돌이켜요. 무덤에 해골을 꺼내 벧엘 제단에서 불살라 (제단을) 다시는 못 쓰게 해요. 그리고 성경이 이 모든 개혁을 해석하는 한 문장을 붙이는 거예요. ‘그 전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되었더라’ 우리가 큐티하는 게 이게 대단 한 거예요. 이 한 문장을 알아들으려면, 300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여로보암이 벧엘 제단을 세우고 첫 분향을 하던 날이었어요. 북이스라엘 나라에 새 예배가 시작되는 날, 개국 기념일 같은 날이죠. 왕이 제단 곁에 섰는데, 유다에서 웬 사람 하나가 올라왔어요. 그 사람은 자기 뜻으로 온 게 아니래요.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왔다”고 했어요. 이름도 안 나와요. 그냥 ‘하나님의 사람’이라고만 해요. 근데 그 사람이 왕한테 말하지 않아요.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여로보암은 반역하고 나가서 대왕이 됐잖아요. 그 사람한테 가서 경고를 하려고 그러는데, “여로보암 당신!” 이렇게 하면 안 되는 거죠. 제단한테 말을 해요. “제단아! 제단아!” 이러면서, 이 절에 “제단아! 제단아!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그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서 제물로 바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서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여로보암이 못 알아들을 소리로 예언을 했어요(왕상13:1-3). 왕상13:1-31. 보라 그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유다에서부터 벧엘에 이르니 마침 여로보암이 제단 곁에 서서 분향하는지라2. 하나님의 사람이 제단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쳐 이르되 제단아 제단아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그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서 제물로 바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서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하고3. 그 날에 그가 징조를 들어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징조라 제단이 갈라지며 그 위에 있는 재가 쏟아지리라 하매 그러니까 우리 믿음은 금세 알아듣겠지만은 이 대왕마마는 이걸 못 알아들어요. 그래서 뭐든지 예언과 경고를 할 때, 지혜가 있어야 돼요. ‘요시야’가 태어나기 오래전에 300년 전에 하나님은 그 이름을 먼저 부르셨어요. 23장의 개혁 기사에서 요시야는 줄곧 ‘왕’이라고만 불려요. ‘왕’이 명령하고, ‘왕’이 헐고, ‘왕’이 더럽게 했다고 해요. 그런데 16절에서 처음으로 ‘요시야’라고 이름이 나와요. 300년 전 예언한 말씀 속에 박혀 있던 그 이름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은 300년 뒤에 이름 하나도 틀리지 않았어요. 근데 우리는 어제 읽은 말씀을 오늘 아침부터 ‘예외’ 처리해요. ‘말씀이라도 내 경우는 달라. 우리 집은 어쩔 수가 없어.’ 그죠? 그렇죠? 말씀이 부정확한 게 아니에요. 내가 자꾸 나를 ‘예외’로 만드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경홀히 여기는 거예요. 무덤들을 보는 요시야 눈에 비석 하나가 들어오는데요. 17절 18절이에요.17. 요시야가 이르되 내게 보이는 저것은 무슨 비석이냐 하니 성읍 사람들이 그에게 말하되 왕께서 벧엘의 제단에 대하여 행하신 이 일을 전하러 유다에서 왔던 하나님의 사람의 묘실이니이다 하니라 18. 이르되 그대로 두고 그의 뼈를 옮기지 말라 하매 무리가 그의 뼈와 사마리아에서 온 선지자의 뼈는 그대로 두었더라_왕하 23:17-18그 비석은 바로 요시야의 개혁을 예언했던 하나님의 사람의 묘실이었어요. 이를 안 요시야는 그의 뼈를 건드리지 말라고 명령해요. 그런데 그 곁에 누가 같이 묻혀 있었나요? ‘벧엘의 늙은 선지자’예요. (이 두 사람 이야기 기억하시나요? 한 10명만 대답을 하네~~ 이거 열왕기상 13장에서 제가 아주 그냥 스펙타클하게 설교했는데~~ 기억이 멀리~ 멀리~ 갔더니~ 이렇게 됐죠?) 하나님은 그러니까 여로보암이 개국하는 날 남유다에서 선지자를 보낸 거예요. “너 그러면 안 된다!” 그러니까 그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시면서 조건을 다셨어요. “여로보암 앞에 가서는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돌아오지도 말라!”고 그래요. 그냥 말씀만 딱 전하고 오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그는 여로보암 왕이 붙잡고 회유해도 안 넘어갔어요(왕상 13:9). 거기까지는 기가 막힌 적용을 했는데…. 거기에 이제 벧엘의 늙은 선지자가 그를 쫓아와서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왕상 13:18) 이렇게 얘기를 하니까 거기 넘어가서 돌아가 먹고, 마셨고. 그래서 그 길에 사자를 만나 죽었어요. 기억나시죠? (이제는 기억난다네^^;) 왕 앞에서도 꿈쩍 않던 사람이 같은 선지자의 말 한마디에 무너진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늘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에요. (아이고 똑똑하세요. 예.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근데 그를 속인 그 늙은 선지자가 괴롭잖아요. 죽기 전에 유언을 남기는 거예요. “내 뼈를 그 유다의 하나님의 사람 그의 뼈 곁에 두라” 왜죠? 그가 외쳐 말한 것이 반드시 이룰 것임을 믿었기 때문에(왕상 13:31-32). 참 이상하죠. 한 사람은 말씀은 전해놓고, 정작 자기에게 주신 말씀에는 불순종해서 죽었어요. 그러니까 말씀은 제대로 잘 전할 수 있는데, 자기는 불순종해서 죽을 수 있는 사역자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어요. 그래서 “저 사람 설교 너무 잘해. 근데 삶이 이상해” 그런 사람 있을 수 있다는 거죠. 예. 그런데 또 한 사람은 선지자면서 거짓말을 했어요.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니라~” 이래 가면서. 근데 성경은 두 사람을 미화하지 않아요. 말씀 맡은 사람들이 이렇게 넘어진다는 걸 보여 줬잖아요. 우리가 목회자에게, 부모에게 상처받을 수 있어요. 그런데 목회자 때문에, 부모 때문에, 목자 때문에 목장을 떠나고 싶을 수도 있어요. 그래서 맨날 “떠나겠어요!” 이 많이 말하죠. 근데 부모와 목자의 실패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까지 놓아 버리면 나를 살릴 마지막 줄을 내 손으로 놓는 거예요. 그건 어리석은 거예요. 부모님보다 목사님보다 위대한 게 ‘말씀’인 거예요. 말씀!! 우리도 누군가에게는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잖아요. 부모로, 목자로, 선배로 말입니다. 하지만 내가 전한 그 말씀대로 살지 못해서 나 때문에 말씀을 놓아 버린 사람은 없는지 늘 돌아봐야 하는 거예요. 나 때문에 “상처받았다”고 그러면 늘 인정하시면 돼요. “그랬냐고” 그 하나님이 깨닫게 해 주세요. “그랬냐고, 제가 몰랐다고. 죄송하다고” 그래야 되는 거예요. 목자가 돼서 같이 싸우시면 안 돼요. 왜 싸웠어요? ^^;; “내가 너 비위 맞추라고 목자 된 줄 아냐?!” 이러시면 이제 안 돼요. 그럴 수도 있겠죠. 그럼에도 이제 여러분들이 그래도 위치상 질서 속에 있을 때 윗사람은 늘 사과 해야 돼요. “내가 뭘 잘못해서 사과해요?!” 그러면 절대로 안 돼요. 잘못해서 사과하라는 게 아니고 ‘구원’이라는 거는 항상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전한 사람도 이렇게 듣는 우리도 이래요. 왜냐하면 그 말씀이 어떻게 되는 거예요? 300년이 지나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보세요. 온 산의 뼈가 다 끌려 나와서 불태워지는 날에 “그 무덤 하나만 옮기지 말라!” 하십니다. 그가 외친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으니까 그가 전한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도장 찍어주신 거예요. ★말씀 맡은 사람은 말씀을 어길 수 있어도 하나님은 자기 말씀을 어기지 않으십니다. 이 말씀은 지친 사람에겐 위로이고, 버티는 죄인에겐 경고예요. 몇 년을 기도했는데 아무 변화도 없어서 이 말씀은 우리 집에는 안 되나 보다 하고 덮어 버린 일은 없습니까? 근데 벧엘의 그 말씀은 무려 300년을 기다렸어요. 근데 그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그리고 여로보암도 죽고 왕조도 바뀌고 나라까지 망해버렸어요. 그래도 그 말씀은 살아 있었어요. 이사야 55장 11절에서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하셨잖아요. 내가 기다리다 지쳐 폐기 처분한 그 말씀을 하나님은 한 번도 폐기하신 적이 없었어요. 근데 듣기 좋은 약속만 말씀이 아니에요. 요시야는 이미 들었어요. “내가 이곳과 그 주민에게 재앙을 내리되” 열왕기하 22장 16절. 벧엘의 이 말씀이 300년 만에 이루어진 것처럼 심판의 말씀도 반드시 이루어지는 거예요. 왜? 하나님은 언제나 100% 옳으시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산당은 여전했어요. 왕이 바뀌어도 버텼어요. 선지자가 외쳐도 버텼어요. 나라가 망해도 버텼어요. 그러나 말씀은 더!!! 여전했어요. 산당보다 더 여전했어요. 300년을 버틴 산당도 말씀 앞에서는 하루를 더 버티지 못해요.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300년이 하루도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기다리다 가야 돼요, 천국을. (아까 (간증하신) 집사님이 천국에서 나를 뵙겠다고, 아주 고마워요. 저를 천국에서 볼 수 있는 사람으로 인정해 준 것 때문에 너무 반가워요.) 300년 뒤에도 벧엘 제단을 정확히 찾아낸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도 살아 있어요. 내가 말씀을 읽은 줄 알았는데 말씀이 내 안에 산당을 딱 찾아내는 거예요. 말씀은 오늘도 내 산당을 향해 “제단아! 제단아!!”고 외칩니다. ▪ 적용 질문Q. 오래 기도해도 안 되어서, ‘우리 집에는 안 되나 보다’ 하고 덮어 버린 말씀이 있습니까? (‘내가 이 말씀을 보면 뭐 해~ 되는 게 없는데~’ 이게 주제가가 되면 안 되는 거예요. )Q. 사람에게 실망해서, 하나님의 말씀까지 놓아 버린 적이 있습니까? (이건 정말 바보인 거예요. 그야말로 사람에게 실망해서 그러면 안 되는 거예요. )Q. 오늘 말씀이 “제단아, 제단아” 하고 콕 집은 내 산당은 무엇입니까? ( “제단아 제단아!!” 하고 내 산당을 콕 집었어요. 내 산당을 좀 찾아내 보세요. )Q. 300년 뒤라도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습니까?제가 이제 케냐 가기 전에 당회를 했는데요. 우리는요, 당회를 해도 이렇게 늘 나눔을 해요.^^ 이상한 교회죠. 한 장로님이 십수 년 전에 증권 계좌에 여유 자금을 넣어두고 있었는데 관심이 없어서 비번도 잊어버릴 지경이었다네요. 이제 직원이 병원으로 교회로 찾아와서 주식에 투자하라고 권해서 제일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S전자를 사게 되었다는 거예요. 그러고는 잊어버리고 있는데 갑자기 작년 말부터 오르기 시작해서 이제 올라도 너무 오르니까 환자 보기가 이제 시들해지고. (하루하루 올라가는 거 보니까).그래서 그 이렇게 나눔을 하니까 이게 굉장히 심각한 거잖아요? 어떤 부목자님도 회사를 그만두고 이제 차에서 하루 종일 주식만 쳐다보고 있다가 교회를 안 나온다고 그런 나눔을 읽어드렸잖아요. 그죠? 그래서 “지금 당장! 당장! 정리하시라!!”고 했어요. 그때 옆에서 누군가 “상반기 실적 평가하고 각종 호재가 많아서 한 두어 주일은 더 기다렸다가 파시면 좋을 건데요~ 이왕 그렇게 올라갔으니까~” 그래서 “그딴 말 듣지 마시고 당장 정리하세요! 당장 내일 정리하세요!!” 그래 가지고 답을 받아냈거든요. 지금 떨어진 건 아니잖아요. “지금 저한테 말한 때가 때예요! 정리하세요!” 그런데 주일에 당회 끝나고 ‘아휴, 그래도 이번 주까지만 팔면 되겠지~’ 합리화하면서 조금 더 오를 때 이번 주말에 이렇게 올라가니까 한주일쯤 더 생각했는데 세상에 목요일이 되니까 주식이 갑자기 정신없이 떨어지는데 자기 생각과 상황 논리만 내세우는 요압이 저 같고, 은 1,000개가 주어져도 왕의 명령을 따르겠다고 한 종의 적용에 저도 이제 주식을 일부 팔 수밖에 없었어요. 떨어져도 일부 매도하여 얻은 수익은 현재 투자 금액의 두 배 이상을 보유하게 되었고 그 당시 떨어질 때인데도 너무 잘 팔았다는 생각에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요즘 주식 시장을 전문가들도 해석하지 못하고 있는데 목사님은 전문가보다 더 전문가이시라는 생각이 들었고, 제 생각에는 목사님의 이 명령을 지켜주시려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 (그러니까 이제 그때가 이제 피크인데 사실 피크 때 지금 팔려고 제가 이렇게 한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그런데 이제 그날부터 떨어져서 일부 팔았지만 죄송하게도 너무 떨어져서 아직 팔지 못한 주식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만일 당회 후에 월요일이나 늦어도 화요일 날까지 팔았다면 어마어마한 수익을 봤을 건데요. 목사님, 이번 일을 통하여 제가 불순종, 불충성하는 죄인이고 믿음이 하나도 없는 자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어요. 목자의 말을 듣고 집을 판 목원보다 못한 자예요. 제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 저의 실체를 정확히 볼 수 있었습니다. 처방이나 말은 쉽게 하면서 적용하지 못하는 저의 굳은 악한 탐심의 뿌리를 보게 되었어요. 정말 저는 할 말 없는 죄인이고 재를 뒤집어써도 모자랄 자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목사님, 앞으로도 평생토록 이번 일을 잊지 않고 끊임없이 회개하며 저를 고쳐 주시기를 기도하며 가겠습니다. 너무 죄송하고 감사드리고 날마다 큐티 노트에 회개하며 기록하였습니다. 십일조는 전부 매도 후 하려고 했는데 일단 매도한 수익부터 하겠습니다. (이게 중요한 적용이라서 읽어드려요.)이 여전한 산당 제사가 어떻게 끝난다고요? 이제 뿌리까지 헐어야 끝나는데 그거는 말씀이 임하지 않고는 안 된다 그랬잖아요. 말씀이 임해야 돼요. 아무리 말씀이 임해도 세 번째는, 3. 예배로 돌아와야 끝납니다(19-20절)예배가 회복돼야 되는 거예요. 19절이에요. 19. 전에 이스라엘 여러 왕이 사마리아 각 성읍에 지어서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산당을 요시야가 다 제거하되 벧엘에서 행한 모든 일대로 행하고_왕하 23:19열왕기의 오랜 꼬리표가 여기서 마침내 뒤집히는 거예요. 선한 왕이 나올 때마다 따라붙던 한 줄 기억하시죠? “오직 산당은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기억나시죠? 그런데 오늘은 달라요. “산당을 요시야가 다 제거하되” 같은 ‘제거하다’라는 말이에요. 수백 년 동안 반복되던 그 말이 오늘 마침내 “다 제거하되”로 뒤집힌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족집게라서 이제 여러분들이 “언제 팔까요? 언제 살까요?” 이제 물어볼 예정이에요? 그게 아니고요. 장로님이 불로소득이 많아지니까 기쁜 게 아니고 병원이 시들해진다고 그렇잖아요. 그렇잖아요? 올라가는데 그 병원 환자 받아봤자 그 돈하고 비교가 안 되니까. 그래서 이 구원에서 멀어질 것 같으니까 당장! 당장! 처분하라고 (말씀)드렸죠. 옆에서 “두어 주일 상반기 실적 보면~~”라고 얘기해도 “그딴 얘기 듣지 마시고 당장 팔라!”고! 그런데 이 말을 안 들으신 거죠. 그죠? 이거 들으셨으면 얼마나 좋아요. 갑자기 저한테 다 물으러 올까 봐^^;; 저는 그런 점쟁이 아니에요. 구원 때문에!! 구원 때문에! 드린 말씀이에요. 일단 손해는 보지 않았잖아요. 앞으로 (주가가) 더 올라간다고 할지라도 오늘 파셔야 되는 거예요! 아무리 더 올라간다고 하든 오늘이 팔 때인 거예요. 이게 구원의 타이밍이에요. 십자가는 지혜고 타이밍이라고 했잖아요? 이 19절이 무엇을 겨냥하는지 보세요. 멸망한 북이스라엘 땅에 들어와 살던 이방 사람들의 종교가 아니에요. “이스라엘 여러 왕이 사마리아 각 성읍에 지어서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산당”이에요. 말씀은 늘 남의 우상보다 내 산당을 먼저 겨누죠. 그죠? 그러니까 (이방의) 아세라, 바알 목상보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산당이 더 나쁘다는 거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여기 와서 다 금송아지 섬기고 있으면서 “믿는다!!” 그런다는 거예요. 히스기야도 산당을 부쉈죠. 근데 아버지가 부은 것을 아들 므낫세가 금세 다시 세웠어요. 은혜받고 부쉈다가 사건이 오면 도로 세우는 거예요. 우리도 주말에는 히스기야였다가 월요일에는 므낫세가 되고. 그죠? 수요일 날 다시 요시야로 돌아왔다가 다시 목장에서는 이렇게 부셨다가 세우고 부셨다가 세우고. 그래서 여러분들이 늘 우상을 (다시) 세우니까 예배를 가서 부셔야 돼요!! 부셔야 돼요! 알아요? 주일, 수요일, 월요일, 목요일, 금요일, 주일, 일주일 내내 말씀으로 부셔야 돼요. 공동체에서 부셔야 돼요!! 알았어요? 요시야는 자기 땅에서 멈추지 않았어요. 국경 넘어 벧엘과 사마리아까지 가서 그 산당들을 다 제거합니다. 여로보암 한 사람의 죄가 여러 왕의 관행이 되고 백성의 문화가 되고 나라가 망한 뒤에도 살아남았어요. 산당은 나라보다 오래 삽니다. 그런데 그 산당을 끝낸 건 요시야의 망치가 아니에요. 하나님이 한 사람의 순종을 통해 마침내 끝내신 거예요. 그런데 열왕기가 무서운 대조를 하나 보여줘요. 산당을 제거하지 않은 북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이 그 땅에서 제거하셨어요, 열왕기하 17장에 보면. 그러니까 산당은 그대로 있는데 세상에! 백성이 뽑혀 나간 거예요. 회개로 내어놓지 않은 산당은 결국 심판으로 드러나는 거예요(왕하 17:22-23). 하나님이 심판을 기뻐하셔서가 아니고요. 돌아오라고 300년을 오래 참으셨는데도 끝내 산당을 붙들었어요, 하나님을 붙든 게 아니고. 산당을 붙들었기 때문에. 이게 남의 얘기가 아니에요. 우리가 여기서 꼭 물어야 할 게 있는데요. ★★요시야는 왜 여기(벧엘)까지 갔을까요? 이 사람은 이미 유다에 재앙이 임한다는 말씀을 들었어요. 북이스라엘도 망했잖아요. 남유다도 망한다고 잘될 보장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런데도 개혁을 멈추지 않았어요. 그것도 자기 나라가 아니라 이미 망해버린 옛 형제의 땅까지 찾아가서. 요시야는 벧엘의 죄를 ‘이제 내 나라의 일도 아닌데 …’ 하며 남의 일로 버려두지 않았어요. 그날에 그 남의 땅을 자기 책임으로 여겼어요. 거기 산당 부순다고 세금이 더 들어옵니까? 자기 이름이 더 높아집니까? 우리가 T/T 가는 것이 세상적으로 여러분 명성 때문에 갑니까? 얻을 게 하나도 없어요. 돈 들여가며 차비 들여가며 그 더위를 무릅써가며 가는 건 왜 가요? 하나님이 옳으시기 때문에! 여호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거 말고 이유가 있어요? 이게 ★하나님 자체가 상급이 되는 게 산당을 제거하는 거예요. 이게 산당 제사의 반대예요. 그러니까 T/T를 갔다가 너무 은혜를 받으시니까. 거기(현지 교회)보다 여러분들이 은혜를 더 받았어요. 항상 주는 자가 복이 있는 거 아시죠? 그래서 다 여러분들을 위해서 박수를 쳐드리고 싶어요. (박수!!) 정말 수고하셨어요. 저도 수고 많이 했어요. 서로 이제 수고! (박수!!)그러니까 산당은 잘 되려고 드리는 예배잖아요. 근데 요시야의 순종은 잘될 게 하나도 없는데 드리는 예배예요. 그러니까 ★★★잘될 게 없어도 드리는 예배만이 잘 되려고 드리는 제사를 이기는 거예요. 우리 순종에는 늘 조건이 붙어 있어요. ‘이만큼 했으니까 되겠지. 이번에 응답해 주시겠지’ 그런데 안 되면 어떻습니까? 안 될 때도 드리는 예배가 있습니까? 붙으면 회개 떨어지면 감사할 수 있습니까? 그게 없으면 내 신앙은 이름만 예배지 사실은 ‘산당 제사’를 드리고 있는 거예요. 나의 모든 것이 눈에 보이는 금송아지 위해서 예배를 드리면 그게 산당 예배인 거예요. 20절입니다. 20. 또 거기 있는 산당의 제사장들을 다 제단 위에서 죽이고 사람의 해골을 제단 위에서 불사르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더라_왕하 23:20이거를 또 문자적으로 ‘아휴, 사람을 죽이라고 그러네. 죽여야 되겠네’ 그렇게 들으시면 안 되는 거예요. 한 부목자님 편지를 보내 주셨어요. 요즘 저는 올림픽공원에서 “부정선거! 재선거! 당일투표! 수개표!” 등을 외치는 집회에 참여하고 있으며, 카카오톡 프로필에도 저의 정치적 성향이 드러나는 이미지를 올려두었어요. 근데 얼마 전 목장에서 한 집사님께서 “부목자님, 이렇게 하시면 취업도 안 됩니다”라고 말씀하셨어요. 이후 권찰님께서도 프로필 사진의 정치 성향을 드러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시면서 예전에 비슷한 일로 평원님께서 마을님을 크게 책망하신 적이 있었다는 말씀을 해 주셨어요. 정치적 표현을 자제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 스스로는 분별하기가 어렵습니다. 여러분도 처방 한번 해보시죠. 다들 부목자님을 사랑해서 한 말씀이라고 보여지긴 하는데요. 자, 말씀대로 여러분 북이스라엘도 앗수르 때문에 망한 게 아니고 회개하지 않고 우상숭배했기 때문에 망했다고 분명히 나와 있다고 했죠. 그리고 남유다에 100년 이상의 유예기간을 주셨어요. 남유다도 이제 바벨론 때문에 망한 게 아니라 회개하지 않아서 망했다고. 그러니까 우리 전쟁이 오면 회개하라고. ‘그 사람 -전쟁을 하러 오는 그 사람을- 죽이라고’가 아니라. (우린 죽일 수도 없어요. 그죠?) 그러니까 늘 회개를 해야 되는데. 회개하지 않아서 망했다고 하는데 이런 가치관을 가지는 사람이 성도들 중에 좀 있어야 될 거 아니에요! 우리는 이쪽저쪽 모두 이해타산을 내려놓고 회개하고 교회의 본을 보여야 하는데요. 편 가르기가 아니라! 이 집회에 참여해도 ‘영혼 구원의 마음으로’ 참여하라는 거예요. 영혼 구원의 마음으로. 누가 뭐라는 게 아니라. 만류를 해도 같은 마음으로 진영 논리를 내려놓고 ‘영혼 구원의 마음으로’ 만류를 하라는 거예요. 여러분, 여러분의 각자 당리당략을 위해서 지금 이러고 저러고 얘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산당의 제사장들을 죽이라”고 한 것은 구약 이스라엘에 주어진 언약 심판이에요. ★우리가 무너뜨려야 할 것은 사람이 아니라 내 안에 교만과 탐욕과 자기 방식의 산당이에요.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이 아닌 거예요. 그러니 본문은 마지막에 어디를 보여줍니까?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더라” 요시야는 부수는 사람으로 끝나지 않았어요. 예배의 자리로 돌아오는 사람이었어요. 산당을 제거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이 귀환은 다음 본문에 ‘유월절’로 이어져요. 산당을 제거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고, 그러고 이 예배를 하는 거예요, 예배! 근데 우리는 어디서 멈추나요? 부수는 데서 멈춰요. ‘끊는 결심’은 있는데 ‘돌아오는 예배’가 없어요. 술은 끊었는데 말씀을 안 봐요. 관계는 차단했는데 목장에는 안 나와요. 중독된 앱은 지웠는데 예배의 자리를 채우지 않아요. 그러니까 비워놓은 그 자리에 다른 산당이 들어오는 거예요. 반쯤 태운 우상은 반드시 다시 살아납니다. 산당을 비워놓는 것이 회개가 아니에요. 하나님께 돌아와 예배하는 것이 ‘회개의 완성’이에요. 근데 요시야가 돌로 된 제단은 다 부쉈어요. 그러나 백성의 굳은 마음까지 새롭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새 언약을 약속하세요. 에스겔 36장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겔36:25-26) 오늘 ‘제거’라는 말 많이 들으셨죠? 마지막으로 제거해야 될 게 뭡니까? 내 굳은 마음이에요. 우리의 인생을 주장해 가는 것은 감정, 이성, 지성이 아니라 바로 죄예요. 눈을 뜨면 지탱하는 것들, 살게 하는 것들이 다 죄예요. 그 굳은 마음이죠. 그걸 내가 제거를 못해요. 하나님이 해주실 수밖에 없어요. 하나님이 해주셔야만 우리 굳은 마음이 달라지는 거예요. 수백 년 뒤에 바로 그 옛 북이스라엘 땅 사마리아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세요.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라”(요 4:18). 그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요 4:21-23)요 4:21-23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그러니까 이런 사람만 예배의 말을 알아들어요. 사마리아 여인 같은 사람만 이 ‘예배’, ‘산당 제거’ 이 말을 알아듣는 거예요. 요시야는 잘못된 예배의 자리를 제거했고, 예수님은 참된 예배의 길을 여셨어요. 여러분들이 올림픽공원에 나가든 안 나가든 참된 예배의 길을 제시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래요. 이래야지, 여러분들이 이 진영 논리로 갈라져 가지고 이래라저래라 하면 설득을 못 해요. 여러분들이 진짜 ‘사랑’하셔야 돼요. 백성을 사랑하고, 여러분을 사랑하고, 목장 식구들을 사랑하고. 하나님은 산당을 비우신 그 자리를 참된 예배로 채우십니다. ▪ 적용 질문Q. 응답이 없어서 그만둔 기도나 예배가 있습니까?Q. 끊었다가 도로 살아난 습관이나 죄는 무엇입니까?Q. 내가 다시 찾아갈, ‘버려진 벧엘’ 같은 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Q. 회개로 예배가 완성되었습니까?산당을 제거하는 건 그러니까 ‘회개’예요. 회개하지 않으면 어떤 의견도 안 나와요. 옳고 그름으로 하니까 사랑이 하나도 전달이 안 돼요. 말씀을 아무리 잘 전하면 뭐해요? 사랑이 전달이 안 돼요. “내가 옳아” 그러면 안 되는 거예요. 어떤 분이 “목숨보다 사랑하는 당신, 피곤하시죠? 사랑합니다. 나중에 통화해요.” 이런 남편의 계속된 문자로 인해 도피처로 생각하고 결혼했습니다. 그러다가 내가 집에서 밥만 하다가 내 식구밖에 모르고 죽을 인생이었는데, 나 죽을 때 슬퍼할 사람이 남편도 아니고 아이들밖에 없을 것이었는데, 어느 날 제가 이렇게 스타로 탄생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어떻게 스타로 탄생했을까요? 남편이 바람을 피워서 간증을 했기 때문이죠.^^ 수백 명에게 은혜를 끼치고 이제 살리게 된 거예요. 세상은 힘들어서 못 살겠다고 하지만 집집마다 악을 꾀하는 한 사람 때문에 그 사람이 있어서 여기에 여러분이 이렇게 앉아 계신 거예요! 그러니까 어떤 집사님은 “자기는 그 스타가 되지 못한다, 자신은 죄가 안 보이니까. … 아휴, 자기는 어떻게 스타가 돼야 될까요? 제가 바람 한번 피워서 죄패를 이마에다 딱 붙으면 저도 스타 되는 것 아니에요?” 이런 농담을 하면서 웃을 일 없는 이 세상에서 즐거워하는 것이 우리 목장이랍니다. 아시죠? 이런 해석이 산당을 제거하는 해석이고 예배란 말씀이에요. 우리 전부 산당 제사를 드리고 있는데 목장에서 이런 얘기를 나눔으로 죄가 힘을 잃게 되는 거죠. 그런데 이 세상은 … 어떤 분이 반대로 재혼을 했다고 하는데 남편이 어떤 대학에 수백억을 기증하고 앞으로 또 이제 뭐 엄청난 금액을 더 기증한다는 것을 신문을 보고 알았다는 거예요. 그 남편이 나이가 많았는데 부자인 걸 모르고 재혼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제 문제는 그다음부터 인생이 슬픈 거예요. “내가 호적상의 부인인데 어떻게 내 허락 없이 기부할 수 있는가?!” 그래서 소송을 벌이고 이제 난리를 이제 친 것이죠. 재혼했으면 당연한 거죠. 그 주제를 알아야 돼요. 그죠? 왜 이렇게 가만히 가만히 있어요?^^ 재클린이 오나시스하고 재혼할 때 ‘절대로 유산은 없다. 그 대신에 자기가 죽은 후부터 1년에 13억씩 주겠다, 죽을 때까지’ 그랬는데 딱 죽고 나서 소송을 한 거예요. 자기가 호적상의 부인이라고. 그래서 2천억 원을 받아냈다고 하죠. 그런데 그 사람은 알링턴 국립묘지에 케네디하고 같이 묻혀서 지금 모든 사람의 추모를 받아내고 있더라고요. 거긴 사람이 늘 많아요. 정말 이 땅이 전부 산당에 아주 그냥 아주 그냥.. 나라입니다, 전 세계가. 가치관의 변화로 삶의 질이 달라지는 것이 일류인데 주님을 만나야 삶의 질이 달라지는 거예요. 그것을 만군의 여호와가 자기 이름을 걸고 말씀하십니다. 택함받지 않은 자의 영광이 80년이라고 해도 너무나 짧아요. 산당을 비워놓는 것이 회개가 아니라 그랬죠. 하나님께 돌아와 예배하는 것이 회개의 완성이에요. 회개가 죽어도 안 되는 것이 심판인 거예요. 엊그저께 큐티했죠.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서 다윗이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치소서”(삼하 24:17)라고 회개한 다윗처럼. 교회와 목장에서 타작을 잘 당해가지고 항상 심판의 말을 잘 따르면 내 속에서 쭉정이는 날려가고 알곡이 되어서 그 자리가 훗날 예수님이 오시는 자리가 되었잖아요. 우리도 이 알곡이 되면 여러분들 가정에 여러분들 가운데 예수님이 임재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모두 “스타 탄생”이 되는 거예요. 알아들어요?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꾀는 회개밖에 없어요. 이게 가장 좋은 아이디어입니다! 남편이 바람을 피워도 사람을 살리는 스타가 되어 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분이 가장 일류이고! 산당이 제거되는 정말 유일한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러므로 산당이 제거되는 것은 회개이고! 회개는 예배의 완성인 줄 믿습니다! 말씀 맺어요. 이 여전한 산당 제사가 어떻게 끝이 납니까? 뿌리까지 헐어야 끝난다고 그랬죠. 근데 그거는 여호와의 말씀이 아니면 안 된다고 그랬어요.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뿌리까지 헐어낼 수가 없어요. 말씀이 임해야 돼요. 말씀이 임하는 것은 회개로 예배로 회복되는 거예요. 예배로 회복되는 거예요. 우리들의 싸울 것은 혈기 아니에요. 육체 아니에요. 찬송하고 기도합니다.기도 제목 우리의 기복 신앙인 산당 예배가 폐해지도록 기도하십시다. 금송아지 때문에 타협하지 않고 ‘말씀만이’ 끝낼 수 있는 비결인 걸 알게 해달라고. 산당이 비운 자리에 회개로 예배의 완성이 되도록! 회개의 마음으로 이 나라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악법이 막아지고, 생명법이 제정되게 해달라고! 다 같이 “주님” 부르고 기도합니다.아버지 하나님, 지나간 날들을 다시 생각해 볼 때, 살아온 날들이 금송아지 좋아서 섬기느라고 이제 많이 타협을 했습니다. 주님, 이런 모든 지나간 죄를 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런데 돈과 권력이 있는 요시야가 이 모든 거를 내려놓았어요. 이 땅에서 돈 없이 누가 살 수 있겠어요? 그 누구도 패하지 못한 산당 예배를 폐한 요시야를 주님은 빨리 데려가셨어요. ‘얼마나 힘들면 데려가셨을까’ 생각합니다. 주님, 집이나 교회나 나라나 회개하는 그 한 사람이 나오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산당 예배가 폐해지고 요시야가 회개해서 개혁을 했사오니 우리 모두 같은 마음으로 회개하여 ‘산당 예배’가 아닌 ‘십자가 예배’를 드리도록 주여! 도와주시옵소서. 주님, 내 힘으로 못하고 말씀만이 이 일을 하실 수 있다고 했사오니 우리의 여전한 방식으로 큐티하고 또 구속사로 깨닫고 나를 직면하고 그리고 나아가서 도와주는 이 모든 것들이 얼마나 산당 예배를 제거하는 비결인 것을 우리들이 알고 모든 일에 동참하여서 여러분들이 그 산당 예배를 제거하는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여러분이 T/T로 갔다 온 그 교회마다 열매를 맺어서 이제 8월 달에 다 모여서 다시 한번 총정리를 할 수 있도록 보내 주시옵소서.아버지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온 케냐와 튀르키예도 말씀의 열매가 맺히게 도와주시옵소서!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모두 살려주시옵소서! 모두 모두 살려주시옵소서!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산당을 제거하였더라’의 말씀을 깨닫고 신앙고백으로 드린 저희들의 헌금을 받으시옵고, 하나님 자체가 상급이 되게 하여 주시옵시고, 하나님께 드릴 것만 있고 사람들에게는 줄 것만 있도록 저희들의 사업과 회사와 공부와 프로젝트와 아이디어와 건강과 물질과 관계와 목장에 기름을 철철 부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산당을 제거합시다!”“돈과 술을 내려놓읍시다!”**기도제목**
A:1. 어둠 속에서 어떻게 빠져나와 요단을 건넜는지 자세하게 적고 묵상해서 많은 사람 살리는 사명으로 나아가고, 일반 은총의 치료와 하늘의 위로함 받도록2. 직장과 인생의 주인이 예수님인 것을 알고 사람에게 하는 부탁을 멈추고 만군의 주 여호와께 고단한 인생을 해석할 약속의 말씀이 무엇인지 묻고 찾아내도록B:1. 살려 주신 것에 감사하고 남겨둔 것이 무엇인지 적어보고 전도의 약재료 될 수 있도록 치료와 약 받아 오도록2. 하나님이 나를 볼 때 기묘자라 모사라 한 것들이 어떤 구절에 있는지 찾아 적어보고 목장에 나누도록C:1. 힘들었던 시간들이 말씀으로 해석되고 위로 받아 참 평강 누리도록D:1. 참 잘했다 착한 종이라 칭찬받고 주신 사명 따라 경계를 지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과 지혜 주시도록E:1. 300년이 지나도 반드시 이루시고 죄가 시작된 그 자리까지 데려가 개혁하시는 주님의 사랑에 찬양하도록오늘도 은혜와 간식이 넘치는 목장예배를 드림에 감사합니다.
우리의 찌질한 죄의 고백 앞에 중독이 끊어지고, 죄의 이름을 깨달아 그것의 산당을 부서 뜨리고 그 죄가 다른 곳에 또아리를 틀지 않도록 지속적인 회개와 예배로 나아가게 도와주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