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하 20:14~21
여러분은 지난 10년을 돌아볼 때 많이 변하셨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그대로이십니까? 심리학자들의 조사에 따르면 사람들은 지난 10년 동안 자신은 많이 변했다고 여기면서도 앞으로 10년은 별로 변하지 않을 것 같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지금의 나를 거의 완성형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입니다. 지금의 내 모습과 삶이 마치 인생의 결론인 것처럼 여기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오늘 히스기야도 그렇습니다. 많은 업적을 남겼고, 죽을병도 넘겼으니, 이제는 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서 그는 “내가 사는 날에 태평과 진실이 있으면 다 괜찮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성군의 착각이며, 곧 저와 여러분의 착각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내가 사는 날’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오늘 히스기야의 마지막 기록을 통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내가 사는 날만 붙들면 내 것만 보이려 합니다.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이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였으며 어디서부터 왔는지, 그들이 왕궁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묻습니다. 이 질문은 단순한 안부가 아닙니다. 히스기야의 입으로 자기 상태를 드러내게 하시는 은혜의 질문입니다. 이렇게 물어봐 주는 이사야 같은 공동체가 있는 것이 축복입니다.
이사야의 질문에 히스기야는 주저하지 않고 “먼 지방 바벨론에서 왔고, 내 궁에 있는 것을 다 보았으며, 나의 창고에서 하나도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다”라고 말합니다.
히스기야는 왜 이렇게 자랑했을까요? 자랑의 뿌리에는 트라우마와 열등감이 있습니다. 악한 아버지 아하스는 앗수르를 의지했고, 앗수르의 제사 양식까지 성전에 들였습니다. 히스기야는 그런 아버지를 보며 하나님을 믿고 개혁했지만, 마음 깊은 곳에는 앗수르에 대한 두려움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병에서 낫고, 해 그림자가 물러가는 징표도 받고, 보물까지 많아졌습니다. 그러니 하나님도 내 편이라는 생각으로 바벨론과 동맹을 맺어 앗수르를 이겨보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앗수르나 바벨론이나 모두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의지하려는 마음입니다. 내가 사는 날만 붙들면 결국 내 것만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동체와 말씀을 통해 질문하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무엇을 보였느냐.” 그 질문을 통해 내가 붙들고 있는 자랑과 두려움과 열등감을 보게 하십니다.
둘째, 그러나 내 것은 하나도 남지 못합니다.
세상이 알아주는 것에 기뻐하는 히스기야에게 이사야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왕궁의 모든 것과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두었던 것이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하나도 남지 아니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히스기야는 “나의 창고에서 하나도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다”라고 자랑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도 남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결국 히스기야가 자랑으로 말한 ‘하나도’가 심판의 ‘하나도’로 돌아옵니다. 내 것이 아닌데 내 것처럼 자랑하면 그 자랑이 심판이 됩니다. 히스기야는 ‘내 궁, 내 창고’라고 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둔 것’이라고 하십니다. 자기 것이 아니라 조상들의 눈물과 하나님의 은혜로 맡겨진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 집, 건강, 돈, 이력, 학력, 사역, 경건까지 내 것처럼 움켜쥡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이고 싶어 하고, 보여야 이기는 것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도 남지 아니할 것이요.”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 땅에 내 것은 없습니다.
셋째, 그러니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이사야가 무서운 심판의 말씀을 전하자, 히스기야는 “내가 사는 날에 태평과 진실이 있으면 어찌 선하지 아니하리요”라고 합니다. 겉으로는 말씀을 선하게 받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자기 시대만 평안하면 된다는 안도가 숨어 있습니다. 자기 죽음 앞에서는 통곡했지만, 자손이 당할 심판 앞에서는 울지 않습니다. 이것이 ‘내가 사는 날’만 붙드는 사람의 실상입니다.
히스기야는 모든 보물을 내어주고도 이후 다시 앗수르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그제야 그는 “지금은 환란과 징벌과 책벌의 날”이라고 고백하며 성전에 들어가 회개합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앗수르 군대 18만 5천 명을 하루아침에 물리쳐 주십니다.
우리도 히스기야처럼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도 넘지 못한 우리 안의 한계를 그리스도께서 넘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날마다 한계를 넘어가게 하십니다.
히스기야는 들은 말씀이 있었기에 2차 침공이 왔을 때, “내가 자랑하다 이런 일이 왔구나” 하고 진정으로 뉘우치고 돌아섰습니다. 그래서 ‘내가 사는 날에 태평과 진실이 있을진대(19절)' 말씀을 다시 해석해 보면, 후에 아들들이 바벨론에 사로잡혀 왕궁의 환관이 되는 심판 가운데서도 말씀을 깨닫고 돌이키게 하실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고백입니다. 이처럼 히스기야가 마지막에 진심으로 회개했기 때문에 성군으로 자리매김한 줄 믿습니다.
한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어릴 때 죽음의 위기에서 살아난 후 사명의 길을 가겠다고 서원하고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 번의 음란으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우리들교회에 오게 되었습니다. 이후 학교와 여러 사역을 감당하며 인기를 얻고 많은 사람을 맡게 되었지만, 하나님은 빠지고 자기 프로그램과 자기 열심을 자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디스크 파열과 산재 처리 과정에서 자신의 불법이 드러날 위기를 맞았습니다. 그때 공동체의 권면이 이사야의 말처럼 들렸고, 말씀 앞에서 자신이 히스기야와 같음을 보며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살려주시면 정직히 행하고 공동체에서 필요한 사람이 되겠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실패와 질병과 드러남을 통해서라도 우리를 돌이키십니다.
여러분, 내가 사는 날만 붙들면 내 것만 보이고, 내 것처럼 자랑한 것은 하나도 남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내 평안만 구하지 말고, 자녀와 후대의 구원을 구해야 합니다. 내 인생만 챙기지 말고, 공동체와 나라를 품어야 합니다. 내가 사는 날을 내가 붙들지 말고, 주님께 맡기며, 말씀과 회개로 오늘을 그리스도의 날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