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와 설교, 찬양을 통해 말씀 앞에 섭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삶을 나누며 함께 성장합니다.
목장 공동체에서 삶을 나누고 말씀으로 세워집니다.
교회와 세상을 섬기며 복음의 사명을 이어갑니다.
우리들교회를 처음 찾은 분의 새로운 시작을 돕습니다.
우리들교회의 비전과 사람들, 채플 소식을 안내합니다.
[산당을 다 제거하되]
왕하 23:15~20
우리는 요시야의 개혁을 읽어오고 있습니다. 므낫세와 아몬이 57년 동안 퍼뜨린 우상을 가루로 빻아 기드론에 흘려보냈습니다. 그런데 가장 심각한 죄는 죄책감도 없는 기복주의 산당 예배입니다. 열왕기는 산당에 대한 태도로 왕들에 대한 평가를 내리고 있는데, 솔로몬은 기드온 산당에서 일천번제를 드렸고, 아사, 여호사밧, 요아스, 아마샤, 아사랴, 요담 여섯 명의 선한 왕은 산당은 제거하지 못했으며, 히스기야도 산당 제거가 완전하지 않아서 그의 아들 므낫세가 다시 세웠습니다. 남북 왕국을 통틀어 300년 묵은 산당을 완전히 제거한 왕은 요시야뿐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요시야만 기복신앙에서 벗어난 기적의 개혁을 이루었다는 의미입니다. 오늘은 여전한 산당 제사가 어떻게 끝나는지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뿌리까지 헐어야 끝납니다.
요시야는 유다 전역의 개혁에서 멈추지 않고 국경을 넘어 벧엘로 갑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죄의 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로보암은 열 지파를 데리고 북이스라엘을 건국했지만, 백성이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갔다가 마음이 변해서 자신의 왕권을 잃을까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세우고 산당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해서 하나님께 예배하러 올라가는 발걸음을 막았습니다. 예배를 없앤 것이 아니라, 멀리 갈 것 없이, 손해 볼 것 없이, 관계를 깨뜨릴 것 없이 내 형편과 편의에 맞게 바꾼 것입니다. 예배를 꼭 드리되 하나님이 정하신 자리에서 내가 편한 자리로 옮긴 것입니다. 이를 성경은 죄가 되었다고 합니다. 말씀을 내 형편대로 바꾸는 순간 하나님을 등 뒤에 버린 것입니다. 한 번 장소를 바꾸더니 제사장도, 절기도 자기 마음대로 정했습니다. 영적인 일을 육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오직 예배를 부르짖으며 예배의 모든 것을 자기가 정합니다. 여로보암 한 사람의 계산이 북이스라엘 전체를 죄로 끌고 갔고 그 산당이 300년을 갔습니다. 내가 세운 산당도 나보다 오래 살아서 내 자녀가 물려받습니다. 그래서 산당의 뿌리는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고 내가 지키려는 두려움입니다.
요시야는 산당을 파괴하는 정도가 아니라 해골로 채워 부정하게 해서 다시는 성소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도록 구체적으로 개혁했습니다. 우리도 죄를 끊는 것에서 멈추면 안 됩니다. 제단을 처음 세운 두려움과 계산까지 내려가지 않으면 죄는 얼굴과 자리만 바꾸며 계속 나타납니다. 돈을 내려놓은 줄 알았더니 자녀에게 가 있고, 사람 의지를 끊은 줄 알았더니 자리와 인정에 가 있습니다. 요시야를 벧엘까지 데리고 간 것이 자기 열심이 아닌 성전에서 발견된 말씀이었듯,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큐티를 통해 내 죄가 처음 시작된 자리, 죄의 뿌리인 나의 벧엘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둘째, 여호와의 말씀대로 끝납니다.
요시야의 벧엘 산당 개혁을 성경은 “그 전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되었더라”라고 해석합니다. 300년 전 여로보암이 벧엘 제단을 세우고 첫 분향을 하던 날, 남유다에서 올라온 하나님의 사람이 요시야의 개혁을 예언했는데, 300년 후 정확히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요시야는 하나님의 사람과 그를 거짓말로 속인 벧엘의 늙은 선지자가 함께 묻혀 있는 묘실은 옮기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왕의 회유에는 넘어가지 않았지만,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는 벧엘의 늙은 선지자의 말에 속아 불순종하다 죽었습니다. 이처럼 말씀을 맡은 사람도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와 목자, 지도자는 넘어져도 말씀은 넘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실망했다고 하나님의 말씀까지 놓아버리면 나를 살릴 마지막 말씀도 놓게 됩니다. 또한 우리도 말씀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전한 말씀대로 살지 못해 나 때문에 말씀을 놓아버린 사람은 없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말씀을 맡은 사람은 말씀을 어길지라도 하나님은 자기 말씀을 어기지 않으시고 반드시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100% 옳으시기 때문입니다. 산당은 여전했지만 말씀은 더 여전했습니다. 300년 뒤 벧엘 제단을 정확히 찾아낸 것처럼, 말씀이 오늘도 내 안의 산당을 찾아내 “제단아, 제단아” 외치시며 제거하십니다. 그래서 말씀이 임해야 산당 예배가 끝납니다.
셋째, 예배로 돌아와야 끝납니다.
요시야는 국경을 넘어 벧엘과 사마리아까지 가서 산당을 다 제거하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해 예배의 자리로 돌아옵니다. 관계를 끊고, 중독을 끊었어도 예배로 돌아오지 않으면 그 자리에 또 다른 산당이 세워집니다. 회개는 산당을 비워놓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돌아와 예배하는 것이 회개의 완성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 36장에서 새 언약을 통해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새 영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제거해야 할 것은 나의 굳은 마음이고 이것은 죄입니다. 오직 새 영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제거해 주실 수 있습니다.
수백 년 뒤 예수님은 옛 북이스라엘 땅 사마리아의 한 여인에게 영과 진리로 드리는 참된 예배의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요시야는 잘못된 예배의 자리를 제거했고, 하나님은 산당을 비운 그 자리를 참된 예배로 채우십니다.
한 집사님이 남편의 외도를 통해 간증하고 수백 명에게 은혜를 끼치는 스타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집사님이 자신은 죄가 안 보이지만 외도하면 그 죄 패로 스타가 될 수 있다고 농담을 하셨습니다. 이렇게 웃을 일 없는 이 세상에서 즐거워하는 곳이 우리 목장입니다. 주님을 만나고 가치관이 변해야 삶의 질이 달라집니다. 남편이 바람을 피워도 사람 살리는 스타가 되어서 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분이 가장 일류이고, 산당이 제거되는 비결이며, 회개이고, 예배의 완성입니다.
여러분, 여전한 산당 제사는 뿌리까지 헐어야 끝납니다. 그 뿌리는 내가 헐 수 없습니다. 말씀이 임할 때 비로소 죄의 뿌리가 드러납니다. 그리고 예배의 회복으로 돌아와야 끝납니다. 우리가 무너뜨려야 할 것은 사람이 아니라 내 안의 교만과 탐욕, 자기 방식의 산당입니다. 산당은 우리의 힘으로 제거되지 않습니다. 말씀이 임할 때 회개가 일어나고, 예배가 회복될 때 산당 제사는 끝이 납니다. 우리 모두 회개를 통해 산당을 제거하고 십자가 예배를 드리는 주인공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