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와 설교, 찬양을 통해 말씀 앞에 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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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왕하 23:21~27
선을 다해 최고점을 받고도 떨어지는 것은 억울한 일입니다. 요시야가 전무후무한 회개를 하고도 최고의 평가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은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입니다. 요시야는 돌이켰는데 하나님은 왜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을까요?
말씀 듣고 적용해도 내 옆의 사람과 환경이 그대로일 때 우리는 기가 막힙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그대로’를 견디게 하는 세 가지의 ‘그래도’가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그래도 예배합니다.
산당을 부수고 태우고 빻았던 요시야가 마지막으로 내린 명령은 “유월절을 지키라”였습니다. 요시야가 유월절 지키는 일에는 온 백성을 부릅니다. 구원의 특징은 같이 모여서 먹고 나누는 것이기에 내 산당을 제거해야 공동체에서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언약책에 기록된 대로’ 유월절을 지키라고 합니다. 말씀을 내 형편대로 맞추는 게 아니라 말씀에 나를 맞추어 가야 합니다.
유월절은 애굽 마지막 재앙 때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이스라엘 백성의 집은 하나님의 심판이 넘어간 것을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요시야가 산당을 부수러 북이스라엘의 벧엘까지 갔다가 돌아온 종점이 바로 예루살렘, 여호와 앞에서 드리는 예배입니다.
사사시대는 물론이고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도 유월절 지켰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후에 히스기야가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망한 뒤 아주 불완전한 유월절을 지킨 것이 마지막입니다. 요시야가 남북 왕국 역사에서 제대로 된 유월절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지키고 유다는 바벨론에 망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나의 훈련을 위해 수고하는 바벨론 같은 상대방을 불쌍히 여기고 구원을 위해 그곳에서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요시야의 유월절 예배는 나라에 재앙이 임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드린 예배입니다. 내가 원하는 때와 방식대로 상황이 바뀌지 않을지라도 변함없이 선하신 하나님을 예배한 것입니다.
올여름 '청소년 큐티 페스티벌'에 역대 최대로 1,800명가량이 모였습니다. 많은 아이가 큰 은혜를 받고 돌아왔지만, 어떤 아이들은 싸움과 폭행 사건으로 부모와 교사도 감당하지 못해 ‘왜 그대로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말씀이 들리지 않는 것 같고 여전히 철없는 모습일지라도 예배의 자리에 나온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유월절이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은 이야기를 다음 세대에 전하는 절기이듯, 자녀의 모습이 그대로일지라도 부모가 먼저 예배드리는 본을 보이며 구원의 이야기를 물려주어야 합니다.
둘째, 그래도 말씀대로 삽니다.
유월절 예배를 회복한 요시야는 할아버지 므낫세가 섬겼던 우상을 하나씩 제거하며 삶을 개혁합니다.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뿐입니다.
성경이 요시야에게 준 최고의 평가는 '일을 많이 했다'가 아니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요시야가 유월절에 자기 소유를 내놓은 것처럼 마음과 뜻을 다하는 사랑은 돈과 시간 그리고 손과 발이 나가는 흔적이 남습니다.
내 물질과 내 일주일의 시간이 어디로 나가는지 보면 내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요시야는 나라가 망한다는 확정판결을 받고도 그 자리에서 힘을 다해 순종합니다. 하나님 자체가 상급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원하는 결과가 보여야 힘을 내는 것은 순종이 아닌 거래입니다. 요시야를 여기까지 데려온 것은 성전에서 발견된 말씀입니다. 말씀은 우리를 결심에서 삶으로 데려갑니다.
셋째, 그래도 하나님이 옳으십니다.
요시야는 돌이켰지만, 하나님은 “진노가 꺼지지 아니하리라”라고 이미 하신 말씀대로 돌이키지 않으십니다. 성경은 위로의 말씀도 경고의 말씀도 똑같이 이루어집니다.
문자적으로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의 진노는 므낫세 때문인 것 같습니다. 우리도 남 탓하고 싶은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그 말 뒤에 숨는 것을 막습니다. 왕하 21장에서 “이 백성이 므낫세의 꾐을 받고 악을 행한 것이…”라고 합니다.
요시야가 보이는 우상들을 모두 정리해도 그것을 좇던 사람들의 마음까지 돌이킬 수 없습니다. 하루아침에 없어지지 않는 그 마음이 바로 우리 안에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내 힘으로 바꾸려 하지 말고 예배로 인도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우리는 억울한 일을 당해도 남 탓에서 끝나지 않고 내 죄에 도착하는 회개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내 가족과 자녀에게 무엇을 물려주고 있는가, 나는 누구의 므낫세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럴듯한 므낫세가 좋고 부러우니 좋은 말로 세상으로 꾀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판결문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이 친히 택하시고 이름을 두신 이 성전을 버리겠다고 합니다.
요시야는 심판이 철회된다는 약속이 없는데도 순종합니다. 내가 산당을 제거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 내가 제거됩니다. 사건이 그대로라고 하나님이 틀리신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옳으십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회개입니다. 참된 회개는 내 눈물과 수고를 의지하지 않고 어린양의 피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공동체 고백입니다.
한 청년은 청소년 시기에 심한 왕따와 괴롭힘을 당하면서 사람에게 미움받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친구들의 술·담배·외박 권유도 혼자가 될까 봐 거절하지 못했고, 결국 비행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눈치를 보며 살았고 꿈도 소망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모델학과에 들어가 세상이 즐거워지면서 교회를 떠났지만, 친구의 권면으로 청년부 '큐페'에 참석하게 되었고 "이제는 안심하라"는 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났습니다. 지금은 중등 2부 간사로 섬기며, 자신과 같은 시기를 보내며 방황하는 십 대들이 공동체와 예배의 자리를 떠나지 않도록 돕고 있습니다.
여러분, 내 수고와 공로가 아닌 오직 어린양의 피로 살아난 구원의 이야기를 다음 세대에게 전합시다. 기도하고 말씀을 보아도 달라지지 않는 그대로의 상황일지라도 '그래도' 예배하고 '그래도' 말씀대로 살며 '그래도' 하나님이 옳으시다고 고백하는, 하나님 자체가 상급이 되는 인생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