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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무덤에 장사하니]
왕하 23:28~30
요시야는 전무후무한 개혁을 이루었지만, 애굽 왕과의 전쟁에서 죽어 병거에 실려 돌아와 무덤에 장사됩니다. 너무나 허망해 보이는 마지막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요시야가 어떻게 끝났는지만 보게 하지 않습니다. 무덤은 원래 모든 것을 덮는 곳이지만, 요시야의 무덤은 오히려 많은 것을 드러냅니다. 이 무덤 앞에서 누가 드러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말씀과 맞선 나입니다.
열왕기는 요시야의 죽음을 짧게 기록하지만, 역대하는 그 죽음의 의미를 해석해 줍니다. 사건은 그 자체만으로 의미를 알 수 없기에,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그 사건을 어떻게 해석해 주시는지 들어야 합니다. 오늘 내게 주시는 음성으로 듣는 것이 큐티이고, 성경이 나를 읽고 가게 하는 것입니다.
당시 애굽 왕 바로 느고는 무너져 가는 앗수르를 돕기 위해 북쪽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시야가 그 길을 막아섰습니다.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와 출애굽의 원수인 애굽을 생각하면 요시야가 그 길을 막은 것은 충분히 이해됩니다. 그러나 성경이 묻는 것은 요시야의 외교 판단이 옳았느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왔을 때 들었느냐는 것입니다. 느고는 자신이 유다와 싸우러 온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명령하셨으니, 하나님을 거스르지 말라고 합니다. 역대하는 이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이라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가장 잘 들었던 요시야가 이번에는 그 말씀을 듣지 않고 싸우러 나갑니다. 훌다 여선지자의 말을 듣고 옷을 찢으며 회개했던 요시야였지만, 자신이 인정하기 어려운 통로로 말씀이 오자 듣지 못한 것입니다. 요시야는 마음을 돌이키는 대신 변장했고, 옷은 바꾸었지만 길은 바꾸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믿지 않는 배우자나 시어머니, 상사처럼 내가 인정하기 싫은 사람을 통해서도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이미 많은 일을 묻고 통과해 왔기에 자기도 모르게 확신이 생긴 확신이 오히려 주님의 말씀과 맞설 수 있습니다. 어제의 순종을 오늘의 정답으로 우기면 순종이 자기 의가 됩니다. 그러므로 사건 앞에서 누구 때문인지만 묻지 말고, 지금 내가 어떤 말씀과 맞서고 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둘째, 놓지 않으시는 하나님입니다.
요시야는 느고의 말을 듣지 않고, 왕의 신분을 감추기 위해 변장하여 전쟁에 나갔다가 화살에 맞아 죽습니다. 한 번의 잘못에 비해 너무 가혹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많은 은혜를 받고 많은 사명을 맡은 사람은 작은 어긋남도 그냥 두지 않고 다루십니다. 이것은 버리셨다는 뜻이 아니라 가까이 두고 다루시는 ‘수준의 대우’입니다.
그런데 징계가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무덤에 장사하니”라는 말씀은 훌다를 통해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이곳에 내리는 모든 재앙을 네 눈이 보지 못하리라”고 하신 약속의 성취입니다. 요시야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지 않았습니다.
역대하는 요시야의 생애를 “여호와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행한 모든 선한 일”로 기록합니다. 그의 “듣지 아니하고”를 기록한 성경이 동시에 그의 평생의 신실함도 기억합니다. 마지막 한 걸음의 실족이 요시야 평생의 신실을 지우지 못했습니다. 요시야가 말씀을 놓쳤어도 하나님은 그를 놓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놓지 않으신다는 것은 고난과 죽음을 막아 주신다는 뜻이 아니라, 죽음조차 하나님의 약속 밖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갑작스러운 죽음과 설명할 수 없는 사건 앞에서 우리가 그 이유를 다 알 수 없기에 함부로 단정해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모르는 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슬픔이 그 죽음의 마지막 해석이 아닙니다. 성도는 살아도 주의 것이고 죽어도 주의 것입니다. 그래서 평소 말씀을 묻고 사건을 구속사로 해석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셋째, 대신 죽으신 참 왕입니다.
요시야가 죽자, 백성들은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에게 기름을 붓고 아버지를 대신하여 왕으로 세우지만, 그는 석 달 만에 애굽으로 끌려가 죽습니다. 기름 부음도, 왕의 자리도, 훌륭한 아버지도 그의 인생을 책임져 주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끊임없이 눈에 보이는 왕을 하나님 자리에 세웠습니다. 문제는 왕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왕을 하나님 자리에 세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훌륭한 왕 요시야조차 백성의 마음을 돌이키거나 그들을 심판에서 구원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목사, 목자, 배우자, 부모, 자녀, 성공 같은 보이는 것을 하나님 자리에 세우고 그것이 나를 구원해 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다가 그것이 무너지면 하나님까지 무너진 것처럼 낙심합니다.
여호아하스는 아버지의 왕좌를 대신할 수는 있었지만, 백성의 죄와 심판을 대신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왕들의 무덤이 쌓여 가는 역사 속에서 무덤을 이길 참 왕을 준비하셨습니다. 요시야는 마지막에 듣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벧전 3:18)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은 왕좌가 아니라 죄인의 자리를 대신하셨습니다. 요시야는 죽음으로 생애를 마쳤지만, 예수님은 죽으심으로 우리의 죽음을 끝내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무덤은 끝이 아니라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공동체 고백은 큐페에서 간증한 한 초등학생의 이야기입니다. 이 아이는 아빠가 집을 떠나 새로운 가정을 꾸렸다는 사실로 큰 상처와 배신감을 느꼈고, 인터넷 쇼핑과 아이돌 영상으로 현실을 잊으려 했습니다. 가족을 원망하고 하나님께 불평했지만,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고 마음을 빼앗긴 쇼핑과 아이돌이 우상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가족의 아픔이 자신을 무너뜨리기 위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오도록 부르시는 사랑의 사건임을 해석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포기하지 않으신 것처럼 가족도 포기하지 않고, 가족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며 동생을 사랑으로 품겠다고 결단했습니다.
여러분, 요시야의 무덤 앞에서는 말씀과 맞선 나, 그럼에도 나를 놓지 않으시는 하나님, 그리고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참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납니다. 내 확신이 말씀과 맞서지 않는지 날마다 묻고, 이해할 수 없는 사건도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해석하며, 보이는 사람과 성공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만을 나의 유일한 왕으로 모시는 인생 되시길 축원합니다.